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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卷六.동트기 전

입력 | 2005-09-08 03:03:00

그림 박순철


한신은 제나라가 항복했다는 말을 듣자 반갑기보다는 맥이 쭉 빠졌다. 석달 전 한왕 유방에게 등을 떼밀리듯 조나라로 온 뒤로 자나 깨나 한신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게 제나라를 치는 일이었다. 군사를 모으고 조련하면서도 그의 눈길은 언제나 제나라 안팎의 움직임에 쏠려 있었다.

한신이 사람을 풀어 알아본 제나라는 그 이름만 들어도 울던 아이가 그친다는 패왕 항우를 물리친 족속들이 사는 천험(天險)의 산해(山海)였다. 밖에서 보는 기세로는 제나라를 치려면 3만이 아니라 30만이라도 부족할 것 같았다. 그 바람에 얼른 군사를 내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살피고만 있는데, 역이기가 찾아와 군사를 움직이지 말라는 한왕의 명을 전했다.

한신은 역이기가 제왕(齊王)을 달랠 수 있다고는 믿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좀 더 군사를 키우고 조련시킬 시간을 벌어줄 수 있다고 보아 기꺼이 한왕의 명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역이기가 정말로 제왕을 항복시켜 자신이 할 일을 없애버리니 맥이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는 하수(河水)를 건널 까닭이 없어졌구나. 여기서 군사를 멈추고 대오를 정비하라. 이제는 서쪽으로 돌아가 형양과 성고 쪽의 형세나 결정하는 수밖에 없다.”

한신이 그렇게 탄식처럼 중얼거리자 곁에 있던 변사(辯士) 괴철(괴徹)이 나섰다.

“아니 됩니다. 여기서 멈추셔서는 결코 아니 됩니다. 장군께서는 한왕의 조칙을 받들어 제나라를 치러 오셨습니다. 그런데 어찌 여기서 돌아간단 말씀입니까.”

“한왕께서 역((력,역))선생을 보내 조칙을 바꾸지 않았소?”

“장수가 부월을 받고 싸움터로 나오면 왕명(王命)조차 함부로 바꾸지 못하는 일이 있습니다. 한왕께서는 이미 조칙으로 장군께 제나라를 치게 하시고, 다시 홀로 가만히 사신을 보내(獨發間使) 제나라를 항복시켰습니다. 장군께서 들은 것은 역이기가 제나라로 가는 길에 전해준 말뿐, 제나라 치는 일을 그만두라는 조칙을 장군께 내린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군사를 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괴철은 이름이 한무제(漢武帝)의 이름(劉徹)과 같다 하여 ‘사기(史記)’에서는 기휘(忌諱)로 괴통(괴通)이라 기록된 사람이다. 범양(范陽)에서 나고 자랐는데, 진승(陳勝)의 장수 무신(武臣)이 스스로 무신군(武信君)이라 일컬으며 조나라를 평정할 때 뛰어난 변설로 이름이 세상에 드러났다. 곧 범양 현령 서공(徐公)과 무신 사이를 오가며 양쪽을 달래 무신에게 싸움 없이 범양을 얻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서른이 넘는 다른 성들까지도 항복하게 만들어 무신이 조나라의 왕이 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조왕(趙王)이 된 무신은 장이를 승상으로, 진여를 대장군으로 삼고 괴철은 책사로 곁에 두었다. 그러나 조나라 장수였던 이량(李良)이 반역하여 한단을 급습하고 조왕을 죽이자, 괴통은 장이와 진여를 따라 이량과 맞섰다. 오래잖아 장이와 진여는 이량을 내쫓고 옛 조나라 왕손 헐(歇)을 조왕으로 세웠는데, 그때도 괴철의 공이 적지 않았다.

거록(鉅鹿)의 싸움 때 괴철은 장이와 더불어 거록 성안에 있었다. 그러나 항우가 거록을 구한 뒤 장이와 진여 사이가 벌어져 싸움이 났을 때는 진여 곁에 남게 되었다. 그러다가 장이와 한신이 군사를 이끌고 정형(井형)으로 들어와 진여의 대군을 쳐부수자, 광무군 이좌거와 더불어 한군(漢軍)에 사로잡혀 한신의 막하(幕下)에 들게 되었다.

글 이문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