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미디어의 달인’이다. 적절한 곳에서 적절한 제스처로 사람을 휘어잡는 능력이 있다. 확신에 찬 말을 듣다 보면 경제가 정말 잘 돌아갈 걸로 믿게 된다.
여자는 ‘미디어 정치’와 거리가 멀다. 수줍어하고 말과 생각이 막힐 때도 있다. 머리모양도 정치판에 안 맞는다는 걸 최근에야 안 것 같다.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이 묘사한 총선 대표주자의 모습이다. 집권 사회민주당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와 제1야당인 기민련 앙겔라 메르켈 당수. 슈뢰더가 자신감과 열정의 화신이라면, 말도 조용조용하게 하는 메르켈은 냉정하다고들 했다.
지난 일요일 TV토론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말 잘하는 슈뢰더가 당연히 기선을 제압할 것으로 예견됐는데 뜻밖에 메르켈이 “약속만 하고 지킨 게 있느냐”며 공격적으로 나선 것이다. 3년 전에도 TV토론 덕을 봤던 슈뢰더가 좌파 진영과 함께 맹렬히 추격하고 있지만 18일 총선은 메르켈의 승리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여자는 집에서 애를 봐야 한다”는 의식이 여전한 독일에서 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가 탄생할 전망이다.
남의 나라 선거이니만치 부담 없이 들여다본 메르켈은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와 적잖게 닮았다. 엊그제 노무현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의외로 할 말 다했다는 것 말고도, 과학을 전공했고 아이가 없다는 개인사가 비슷하다. 정치자금 스캔들로 만신창이가 된 당을 맡아 추스른 사실도 일치한다. 특히 여성, 그리고 여성정치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깼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여자는 감정적, 남자는 논리적이라는 통념을 이들은 냉정하게 무시한다. 여자는 수다, 남자는 행동이라는 통설도 이들에겐 해당되지 않는다. 언어학자들은 남자의 언어가 대체로 간단명료하고 강한 반면 여자는 잘 듣고 동의하는 생존의 언어에 더 익숙하다고 했다. 메르켈과 박 대표는 남자의 언어에 가깝다. 오히려 이들과 토론한 남자들이 말이 많다. “유권자들이 미디어 총리의 말재주에 지쳤다”는 영국 BBC 보도는 우리가 써먹어도 될 정도다.
두 사람은 보통의 여성성(女性性)과도 동떨어져 있다. 메르켈은 ‘러시아 탱크’라고 조롱받을 만큼 촌스러운 차림이고, 박 대표는 특이한 또는 전략적인 복고풍 차림새를 고수한다. 박 대표의 배경이 동정심을 자극하는 건 분명하지만, 여성 리더에게 기대되는 자상한 리더십이나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식 애인 같은 리더십과는 차이가 있다. 즉 두 사람은 ‘여자’로 승부하지 않는다. 심심해서 굳이 성별을 가린다면 여성일 뿐이다.
정치인으로서 두 사람의 자질은 시국을 보는 눈에서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세계화 추세와는 거꾸로 가는 집권세력 때문에 나라가 경제위기에 처했다는 시각이다. 메르켈은 “젊은 인구가 많고 라인강의 기적을 이룬 시절에 나온 사회복지정책이 지금은 안 맞는다”며 시장경제로의 과감한 개혁을 예고했다. 노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민생경제, 규제철폐를 끈질기게 주장한 박 대표와 상통한다. 토론이 끝난 뒤 ‘과거 대(對) 미래’란 사설을 쓴 일간지도 나왔다. 어느 나라 같은가. 독일의 빌트였다.
독일은 노 대통령이 엊그제 탐냈던 ‘정책노선 다당제’를 하고 있다. 이 나라에서 중도우파 기민련 총리가 등장한다는 건 유럽복지모델의 종언을 의미한다. 정치적으로 옳아도 경제적으로 잘못된 좌파적 정책으로는 이젠 살아남기 힘들다는 현실을 유럽연합(EU) 25개국 중 20번째로 인정하는 셈이다. 30년 전에 끝난 경제기적을 파 먹으며 오늘까지 유지해 온 것만도 용하다.
독일이 실패를 자인한 길로 우리의 집권세력은 줄기차게 가려 한다. 치마든 바지든 상관없다. 정치인의 성별을 따지는 건 철 지난 이데올로기만큼 무의미하다. 잘못된 행로를 막을 정치 능력을 누군가는 보여 줘야 한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