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에 대한 유엔의 석유-식량(Oil-for-Food) 프로그램이 검은 거래로 얼룩졌다는 사실이 속속 드러나면서 올해로 창설 60주년을 맞는 유엔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
폴 볼커 전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이끄는 유엔 석유-식량 프로그램 조사위는 7일 1년여에 걸친 조사활동 결과를 코피 아난 사무총장이 주재하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에 보고했다.
조사위는 보고에서 총 690억 달러(약 69조 원)가 들어간 석유-식량 프로그램에 대해 프로그램에 참여한 회사 4500여 개 중 절반이 뇌물을 제공했을 정도로 검은 거래가 난무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조사위는 “유엔사무처와 안전보장이사회는 이 같은 불법을 방치했으며 결과적으로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의 사욕만 채운 결과를 초래했다”고 비판했다.
후세인 전 대통령은 이라크산 원유를 매입할 석유업자들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뇌물과 리베이트로 18억 달러에 이르는 돈을 챙겼다는 것. 후세인 정권은 이 밖에 별도의 밀수를 통해 벌어들인 돈도 110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고 추산했다.
조사위는 아난 총장에 대해서는 자신의 아들 코조 아난 씨를 고용한 스위스 회사가 사업권을 따내는 과정에 직접 관련됐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는 확보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아난 총장은 뇌물 밀수 등이 횡행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조사위는 비판했다. 아난 총장은 이날 “비판을 받아들인다”면서도 “우리는 임무를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일각에서 거론되는 사임요구를 일축한 것.
조사위는 유엔에 대해서는 ‘21세기형 조직’으로 거듭나야 한다며 대대적인 개혁을 촉구했다. 그 방안으로는 △최고운영책임자(COO) 직 신설 △유엔 프로그램 및 인사를 점검할 독립적인 회계감사 기구 설치 △유엔 산하기관 간 효율적인 업무조정 등을 제안했다.
조사위 보고서가 14일부터 170여 개국 정상들이 참석한 가운데 유엔본부에서 열리는 유엔 정상회의를 앞두고 발표됐다는 점에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그러나 벌써부터 정상회의 공동선언문 채택을 놓고 회원국 간에 의견이 엇갈리고 있어 유엔개혁안이 힘을 얻기는 힘들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이미 유엔개혁안의 핵심인 유엔안보리 확대안은 각국 간 이해관계 조정이 실패하면서 물 건너 간 상황이다.
뉴욕=공종식 특파원 kong@donga.com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