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8월 15일 자정, 인도가 영국에서 독립을 성취한 순간 뭄바이의 한 병원에서 살렘 시나이라고 불리게 되는 사내아이가 태어난다. 신생국 최초의 신생아에게 주는 상금을 노린 살렘의 부모가 때맞춰 연락한 덕분에 그의 출생을 축하하는 네루 총리의 공식 편지가 그의 사진과 함께 세상에 알려진다. 이렇게 자유로운 인도라는 신화에 둘러싸여 삶을 시작한 살렘은 그 신화가 초래하게 되는 혼란과 재난을 두루 거친다. 그래서 인도-파키스탄전쟁을 비롯한 갖가지 풍상을 겪은 이후 그는 과거를 회고하며 “나를 이해하려면 당신은 한 세계를 삼켜야 한다”고 말한다.
‘한밤의 아이들’은 작중 화자 살렘이 그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자기 운명이 인도의 운명과 불가분으로 맺어져 있다고 믿는 인물답게 그는 자신의 체험을 기록하는 동시에 독립 이후 인도의 역사를 기록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의 기억은 통상적인 자전적 서술에서와 달리 역사의 추세에 따라 조리 있게 펼쳐지는 개인적 정체성을 낳지 못한다. 수많은 세계를 삼켜 온 그의 기억은 잡다한 파편들로 흩어지곤 한다. 후식민지 인도의 특징을 이루는 모순과 분열을 그는 파편적이고 다형적인 서사 형식으로 담아내고 있는 셈이다.
‘한밤의 아이들’은 여담 많은 메타픽션적 자서전이라는 면에서는 ‘트리스트럼 샌디’를, 역사의 악몽을 다루는 교양소설이라는 면에서는 ‘양철북’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유럽 소설의 어떤 선례도 이 소설의 특징을 설명하진 못한다. 인도 대중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화자 살렘, 저자 루시디가 고안한 것은 경이로운 인물과 사건을 포용하는 서술 방법이다. 리얼리즘의 구속에서 벗어나 경이로운 것을 회생시키려는 시도는 살렘의 초자연적 감응력을 전달하는 데서부터 빈민굴 마술사들이 일으킨 기적을 서술하는 데 이르기까지 소설 전편에 걸쳐 있다.
‘한밤의 아이들’에서 마술적 리얼리즘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나 카를로스 푸엔테스의 작품에서 그렇듯이 진실을 구제하는 방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현실적인 것과 진실한 것이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다”라고 믿고 있는 살렘은 인도인의 삶을 환상과 현실, 마술과 이성이 뒤섞인 상태 속에 놓고 이야기한다. 그 스토리텔링은 승리자들이 만들어 낸 인도의 역사와 다른 방식으로 인도인의 경험을 지각하게 한다. 그것은 인도의 공식 역사에 감추어진 허위와 모순에 대한 인식을 고조시키는 한편, 기억과 서사의 예술이 가지고 있는, 그 나름의 현실을 창조하는 권능을 부각시킨다.
루시디가 세계 문단의 총아로 부상한 1980년대는 소설이 한창 부흥 중이던 시기이다. 그 부흥은 보통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그 주요 원천은 라틴아메리카를 시작으로 유럽의 옛 식민지 국가에서 일어난 소설의 혁신에 있다. ‘한밤의 아이들’은 포스트모더니즘과 후식민주의를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작품에 해당된다.
한국의 작가나 독자들은 소설 또는 문학의 위기를 즐겨 말하지만 그것이 소설이라는 전 지구적 문학 형식의 힘을 깊이 이해한 발언인가는 의문이다. 아쉬운 점은 1989년에 출간된 한국어판의 번역이 조악한데다 이미 절판됐으며, 새로운 한국어판 번역본은 아직 출간 준비가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라는 점이다.
황종연 문학평론가 둥국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