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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인준 칼럼]정치劇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입력 | 2005-09-13 03:07:00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중심부에서 뛰고 있는 국회의원들을 각각 만났다. 이들의 생각에 공통점이 있다. 대통령이 어떻게 나올 것인지 하는 ‘노무현 변수’를 입력하지 않고는 정국 전망의 답이 출력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경제에 전념할 가능성은 없다는 판단도, 비록 근거는 달랐지만 일치했다. ‘대통령이 판을 크게 흔들려고 하지 않겠느냐’는 예감도 비슷하다.

여당 측은 “대통령이 레임덕(권력누수)을 왜 못 느끼겠느냐”고 반문했다. 한나라당 측은 “이미 레임덕 상태”라고 짚었다. 그런데도 여야 모두 대통령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의 선수(先手)를 지켜보는 게 고작일 정도다.

대통령이 성공해 온 것도 아니다. 2년 반 동안 그가 꺼낸 담론은 열 손가락이 모자란다. 동북아중심국가, 소득 2만 달러, 동반성장, 혁신주도형 경제, 지속가능한 발전, 교육은 산업이다, 균형사회, 공동체적 통합, 효율적 정부, 동북아 균형자, 자주국방…. 다 공허하다.

요컨대 대통령도, 여도, 야도 국민에게 희망을 주고 잠재력을 모으는 데 실패했다. 그런 중에 대통령은 연정(聯政)이라는 새 카드를 꺼냈고 지역구도 해소를 표방했다. 대연정은 좌초 상태지만 대통령이 ‘다음 수(手)’를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데 정치권은 공감한다. “(자신이 외국에 있는) 열흘은 조용할 것”이라는 말을 여야 의원들은 ‘머잖아 정치판이 더 시끄러워질 것’이라는 뜻으로 풀이한다.

대통령의 심리를 이렇게 읽는 여당 인사도 있다. “초조감과 교만(驕慢)이 교차한다. 가만히 있으면 권력이 시들시들 말라 버리고 만다는 ‘식물대통령’ 불안감과 ‘내 수는 결국 통했다’는 자신감이다. 대세에 순응하고, 레임덕을 인내하며, 뒷전에 밀려 임기가 끝나기를 기다릴 성격이 아니다. 참는 훈련이 안 돼 있다. 에포크(신기원·新紀元)를 만들지 않고는 못 배긴다.”

국민은 경제를 살려 재기(再起)하라고 하지만 대통령 자신은 경제로는 승부를 못 낸다고 생각한다는 얘기다. 대안은 뭔가. “앙시앵 레짐(구체제)을 깬 대통령으로 남겠다는 거다. 산업화 구체제와 3김 정치의 잔재, 지역주의 정치구도를 청산할 수만 있다면 임기는 중요하지 않다는 자세에 진정성이 있다.”

대통령의 다음 수는 언제 어떻게 나타날까. 여당 쪽에서 이런 말이 흘러나온다.

“내달 11일까지의 국회 국정감사 중에도 선거제도와 개헌 문제가 거론되고 여야 간에 부닥치는 소리가 난다. 국정감사가 끝나면 대통령은 다음 카드를 던진다. 열린우리당 탈당으로 중립을 과시하면서 지역주의 타파를 위한 선거법 개정, 국민연금 개혁 등 몇 가지를 올해 안에 합의해 줄 것을 여야에 촉구한다. 선거제도는 독일식 정당명부제가 우선 거론된다. 여기서 확실한 성과가 나오면 자신의 정치적 성공으로 간주해 ‘관리형 대통령’으로 계속 간다.”

이 카드가 무산되면? 내년 상반기 대통령 직 사임을 걸고, 바꿀 수 없는 새 선거제도를 명시한 개헌안을 발의할 수 있다. 그러면 여야는 가만히 있을 수 없다. 권력구조와 선거제도를 묶어 절충하는 단계로 들어간다. 퇴임할 대통령이 권력구조에 관해 주도권을 쥐기는 물론 쉽지 않다.

한나라당 측은 여권(與圈)이 권력구조와 선거제도 말고도 헌법 전문(前文) 수정, 영토조항 변경, 사유재산권 제한, 국가범죄 시효 배제 등을 꺼낼 가능성을 떠올린다. 헌법 전문과 영토조항은 대한민국의 정통성 및 남북관계의 틀과 직결되고, 재산권은 경제체제의 근간이다.

개헌 논의는 결국 이런 상황으로 전개될까. ‘권력구조를 둘러싸고 내각제, 내각제 요소가 짙은 이원집정부제, 정부통령 중임제 등이 격돌한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정계가 요동치고 여야당이 깨져 이합집산한다. 개헌이 되건 안 되건 대통령은 임기를 중단한다.’

내각제는 대통령선거의 소멸을 뜻한다. 대선으로 가더라도 대결구도는 예상 밖일 수 있다.

아무튼 대통령과 정치권이 민생경제에 전념하는 ‘기적’은 기대하기 어렵다. 국민은 정변(政變)에 더 익숙해질 수밖에 없다. ‘정치극(劇) 구경 값’도 각오해야 한다. 국론 분열, 국력 소모, 경제의 불확실성, 돈의 해외탈출….

배인준 논설실장 inj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