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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김충식]야스쿠니 참배의 ‘孔子 모독’

입력 | 2005-09-14 03:00:00


일본 총선거에서 ‘대박’을 터뜨린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입심 좋은 정치가다. 원고를 읽지 않고 ‘자신의 언어’로 메시지를 전한다. 이번 자민당의 압승은 분명 그 ‘입’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런데 달변가의 한계가 늘 그렇듯이, 말을 뜯어보면 억지도 많고 아전인수(我田引水)도 있다.

그는 야스쿠니신사 참배가 “일본의 전통과 문화 때문”이라고 우겨 왔다. 일본은 죽은 자에 대한 기억의 방식도, 생사관(生死觀)도 한국 중국과 다르다는 것이다. 일본에선 사람이 죽으면 선악을 가리지 않고 다 ‘부처(호토케사마)’가 되므로,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A급 전범(戰犯)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참배한다는 논리다.

그는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것이 공자의 가르침이라며, 한국과 중국의 반발을 무마하려 한다. “공자님은…” “논어에는…” 하는 그의 ‘공자 말씀’ 인용은 습관성이다. ‘외로운 늑대’라는 별명, 국회 해산 같은 과격성과는 대조적으로 공자와 논어를 앞세우는 일이 잦다.

고이즈미 총리는 ‘사람은 미워 말라’며 참배를 변명한 뒤 두 갈래의 반격을 당했다.

우선 논어에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논어 말고 다른 기록에 ‘오기의(惡其意) 불오기인(不惡其人)’, 즉 그 의도를 미워하되 인간은 미워 말라는 대목이 있을 뿐이다. 나아가 “그 말도 가해자(일본)가 하면 뻔뻔한 것이며 피해자(아시아)나 해볼 수 있는 말”(중국 외교부 대변인)이라고 통박당했다.

야스쿠니신사 참배가 일본의 전통과 문화 때문이라는 억설(臆說)도 비판 받는다. 다카하시 데쓰야(도쿄대·철학) 교수는 그런 주장이 사술(詐術)에 가까운 거짓말이라고 한다. 베스트셀러 ‘야스쿠니 문제’라는 저서에서 다카하시 교수는 지적했다. “일본에는 적과 아군 전사자의 혼령을 함께 위무하는 데키미가타(敵味方) 비석이 있다. 1599년 조선침략 후 고야(高野) 산에 조선과 일본의 전사자를 함께 달래는 ‘원친(怨親) 평등의 비’를 세운 것과 같은 전통 문화가 일본의 것이다.” 그런데 야스쿠니신사에는 대만 한반도 중국대륙 진주만 동남아 각지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죽은 외국인 병사의 위패(혼령)는 단 1개도 있지 않다는 얘기다.

일본 원로 철학자 우메하라 다케시 씨도 “야스쿠니는 일본 신도(神道)의 전통이 아니다. 이긴 쪽 혼령만 제사 올리는 것은 전통에 어긋난다”고 누누이 비판한 바 있다.

고이즈미 총리는 ‘믿음 없이는 서지 못한다(무신불립·無信不立)’는 공자 말씀도 자주 인용한다. 물론 내정에 관해 말할 때다. 그러나 아시아로 시야를 돌려 보면, 그야말로 그 자신과 일본이 설 자리가 비좁음을 알게 될 것이다. 미국 조지 W 부시 정권과는 확고한 신뢰를 유지하는 것 같지만, 아시아와의 신뢰관계는 최악이다. 재일 중국인 저널리스트 쿵젠(孔健·‘차이니스 드래건’ 편집주간) 씨도 “아시아에서 일본이 고이즈미가 자주 되뇌는 ‘무신불립’이라는 건 아이러니”라고 말한다.

쿵 씨는 ‘이(利)의 근본은 의(義)’라는 공자의 화두를 일본에 제시한다. 자기 이익만 추구하면 원한을 사고 만다는 것이다. ‘경제대국’ ‘이코노믹 애니멀’이 왜 따돌림 받는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입 문턱에서 왜 좌절했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 벌써, ‘안보리 꿈’이 무너질 듯하자 일본은 미국에 버금가는 규모로 내온 유엔 분담금을 못 내겠다고 한다. 일본식의 표변이다.

한중과 아시아에 막무가내로 대해온 고이즈미의 일본, ‘9·11 독주(獨走)’라고 할 총선 결과를 놓고 일본 외교의 앞날에 대한 이웃의 걱정이 태산 같다. 총리의 참배는 이미 예고돼 전운이 감돈다. 일본은 신(信)과 의로 가까운 데서부터 마음을 사고 일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

김충식 논설위원 s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