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 21세기의 동북아에서 그대로 국체를 유지하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굶주리는 봉건 왕국, 세습독재체제인 북한의 위협은 그리 겁날 것 없다. 참된 위협은 안에서 오는 위협. 대한민국 건국의 역사적 평가를 부인하고 체제의 이념적 기반을 공동화하려는 내부 세력의 중심 진입, 바로 대한민국의 ‘체제세력이 된 반체제세력’의 중심 장악이다.
독일의 엘베 강에서 한반도의 38도선까지 거대한 유라시아 대륙이 소비에트화되던 1940년대 말 가까스로 대한민국을 수립한 건국의 주역 이승만, 세계 최빈국을 당대에 중화학 공업국가로 탈바꿈시킨 국가 중흥의 주역 박정희의 업적이 지금은 정부의 묵인 내지 방조 아래 공개적으로 폄훼되고 있다. 심지어 맥아더 장군 동상을 철거하자는 주장의 “민족적 순수성을 깊이 평가한다”는 여당 간부의 발언조차 나왔다. 유엔군 깃발 아래 남침전쟁에서 조국을 수호하다 산화한 국립묘지의 영령들을 정신적으로 ‘부관참시’하는 말이다. 눈을 비비고 다시 확인해 봐도 그런 일이 반체제 극렬분자의 소행이 아니라 어엿한 여당이자 체제세력 인사들의 일상적 언행이다.
대한민국이 이대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렇게 정색을 하고 고쳐 물으면 비관의 근거들도 대단치는 않다. 딴은 미래를 비관만 하기에는 남은 날이 많지 않은 사람에겐 미래가 너무나 소중하다. 딴은 대한민국의 역사를 출발부터 겪어 온 지난날을 회고해 보면 이 나라는 지금보다 훨씬 힘든 고비들을 잘도 이겨내고 살아 왔다. 건국 직후 맞은 6·25남침전쟁, 4·19혁명과 대통령의 하야, 5·16군사정변과 유신독재체제, 10·26 대통령 살해와 정치적 공백, 광주 대학살과 신군부의 집권, 6·10시민항쟁과 군정 후퇴 등 참으로 국가 존립의 기반이 위태위태했던 역사적 난국을 우리는 뚫고 오늘에 이르렀다. 지금의 난국에 대한 지나친 비관은 언제나 당면한 현실을 최악의 것으로 간주하려는 동시대인들의 ‘정신적 코케트리(교태)’라고 못 볼 것도 없다.
어떤 구석에선 대통령 노무현의 등장을 ‘종말론적인 현상’처럼 과장하며 개탄하는 소리도 귀에 들린다. 그러나 나에겐 노 대통령의 출현이 나라의 미래를 낙관케 하는 오히려 가장 확실한 담보란 생각이 든다. 미래에 대한 매우 개인적인 몇 가지 소망과 곁들여서 얘기해 본다.
첫째, 노 대통령은 조선조 이래 벼슬을 한사코 좋아하는 한국적 청운(靑雲)의 뜻에 정점인 대통령 자리를 시시한 것으로 탈권위화했고, 나아가 참여정부시대의 여야당이 한결같이 정치 불신을 열심히 팽배케 함으로써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정열과 정력을 정치 아닌 다른 영역으로 전환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다. 그것은 21세기가 한국 문화의 제3의 르네상스 시대가 되리라는 내 소망이 실현되기 위한 전제요, 최근의 ‘한류 열풍’은 그것의 전조이다.
둘째, 오늘의 위기의 가장 큰 원인이 본인도 자인하고 있는 것처럼 노 대통령에게 있다는 데엔 나도 동의한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본다면 노 대통령의 위기는 무릇 대통령제의 위기이다. 갈수록 젊어져 가는 유권자의 변화무쌍한 ‘휘발성’의 민의가 어느 극적인 상황 전개에 나부껴 선출한 한 개인에게 5년 동안 나라와 겨레의 명운을 내맡긴다는 것이 얼마나 위태로운 도박인지…. 정직한 노 대통령은 그 진실을 몸으로써 시위해 주고 있다. 그럼으로써 그는 필자가 바라 마지않는 내각책임제 정부로의 이행과 그 변화의 정당성 설득에 매우 현실적인 기여를 하고 있다.
셋째, 이른바 ‘진보’정권이라는 노 대통령 정부의 전면적인 실정(失政)은 안보 불안, 국론 분열, 경제 침체 등 그 모두가 예외 없이 시대착오적인 구좌파의 사이비 ‘진보주의’ 이념과 무관하지가 않다. 1990년 소련을 비롯한 소비에트 체제가 총체적으로 파산 붕괴한 이후 정보화 세계화의 21세기에 ‘해방공간’의 좌파 망령에 대한 향수에 젖은 낡아빠진 ‘진보주의’가 나라 살림을 맡아갈 수 있는 것일까. 참여정부의 실정이 그 해답이다. 21세기의 참된 진보주의 이념은 새 시대의 담금질 속에서 새로 제련되지 않으면 안 된다. ‘낡은 진보’로는 안 된다. 그것을 노 대통령은 입증하고 있다. 내가 그에게 감사하고 있는 내력이다.
최정호 객원大記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