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역사책 파문이 말해 주듯 교과서는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결코 가벼운 저술은 아니다.
학계의 누적된 연구 성과가 객관적 보편적 시각으로 빠뜨림 없이 망라돼 소화, 정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미술사학자로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최순우(崔淳雨·1916∼1984)는 65세 때인 1980년 틈틈이 발표한 짧은 에세이를 모아 장르별로 나눠 ‘한국미 한국의 마음’을 펴냈다.
이를 교과서로 지칭함은 결코 폄훼가 아닌, 우리 모두의 필독서란 의미이다. 전문적인 논문이나 체계적인 논술은 아니나 때론 그 이상의 무게를 지닌다. 전문학자들에게도 여러 측면에서 두루 시사함이 크다. 미술에 대한 일반인의 접근이 쉽도록 상태가 양호한 도판을 한쪽에 과감하게 한 점씩 실은 이 아름다운 책은 조기에 절판된 후 더는 나오지 않았다.
이를 바탕으로 1992년 ‘최순우 전집’을 간행한 출판사 학고재에서 1994년 저자의 10주기를 맞아 순서에 변화를 주고 내용을 세분해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출간했다.
이 책은 비록 흑백이지만 삼국시대 토기부터 조선 말 회화에 이르기까지 한국미술사 전반에 대한 친절한 입문서이며 안내서이다. ‘한국미의 산책’에서 ‘흔하지 않은 이야기’까지 20개의 주제(보급판은 17개 주제)로 나누어 회화 조각 건축 공예 등 우리 전통미술 전반에 관한 이야기의 타래를 풀어 나갔다.
그러나 무미(無味)한 인문학의 개설서나 그야말로 딱딱한 교과서와는 다르다.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표현대로 ‘이슬보다 영롱하고 산바람보다 신선한’ 미문(美文)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과 추구, 아름다움을 보고 깊이 느끼고 사랑했던 저자. 미술사학자로서의 그의 생활은 한국미의 추구와 실천 그 자체였다.
이 책을 들고 첫 쪽을 펴면 그냥 빨려 들어가 좀처럼 놓기 힘들다. 그리고 우리는 뿌듯하고 행복하다. 이 책은 겨레와 전통문화에 강한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게 한다. 미술사가나 미학자 내지 평론가의 존재는 그들이 느끼고 깨달은 아름다움의 내용과 핵심 그리고 본질을 일반인에게 이해시키고 인식시킴에 있다. 즉 조형 언어에 낯설어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의 의미와 아름다움을 문자로 통역해 주는 역할이 그들의 임무이다.
‘한국 미술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고유섭(高裕燮·1905∼1944)이 1934년 서른의 나이로 개성부립박물관 관장으로 부임해 타계하기 전해인 1943년 최순우는 박물관에 입사한다.
이는 박물관의 법통(法統)을 전수했다는 의미를 지닌다. 박물관 한곳에서 41년 동안 한 우물을 판 박물관인은 전무하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천부적인 안목과 혜안을 지닌 저자는 수많은 문화유산을 실제 보고 만지며 아름다움의 본질을 온몸으로 체득(體得)했다.
그러고 나서 터져 나온 사자후(獅子吼)이기에 독자의 가슴에 강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이원복 국립광주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