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겠지만 도와 달라”고 했어야 했다. 베이징 6자회담이 타결됨으로써 북한 핵문제 해결의 새 틀이 마련됐지만 그 비용은 결국 국민이 부담해야 하기에 먼저 걱정하고 협조를 구하는 모습을 보였어야 했다. “최선을 다해서 부담을 줄이도록 하겠다”는 다짐도 뒤따랐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정권의 누구에게서도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개선장군이 된 듯하고,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한 당정(黨政) 인사들은 축하하기에 바쁘다. 20일 국무회의에선 웃음꽃이 피었고, 21일 열린우리당 확대간부회의에선 찬사와 덕담이 그칠 줄 몰랐다. 문희상 당의장은 “국민의 이름으로 박수를 드린다”고 했고, 장영달 의원은 “경의를 표한다”고 했다. 이에 고무된 듯 정 장관이 “베이징 회담 타결은 우리 민족 스스로의 손으로 우리 민족의 앞날과 평화를 결정했다는 의미가 있다”고 하자, 한명숙 의원이 “아주 감동적인 말씀”이라고 했고, 이미경 의원은 “이런 이야기들을 국민이 더 많이 듣도록 해야겠다”고 거들었다. 배기선 의원이 “당원의 이름으로 꽃다발을 드리고 싶다. 앞으로 통일부의 역할이 달라질 것 같다”고 마무리를 했다.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란 이런 것일까. 적어도 한 사람쯤은 공동성명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앞으로 있을 협상의 중요성을 환기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들뜬 분위기에서 정 장관은 6500억 원으로 잡혀 있는 내년도 남북협력기금을 대폭 늘려 달라고 요청했고 참석자들은 흔쾌히 동의했다. 회의는 그렇게 끝났다.
정 장관은 그제 국회에서 앞으로 부담해야 할 대북(對北) 지원 비용이 9∼10년간 적게는 6조5000억 원에서 많게는 11조 원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민간 전문가들의 예상은 이보다 훨씬 많은 17조 원에서 19조 원에까지 이른다. 이 돈은 누가 내나. 국민이다. 총비용을 정부와 민간 추계의 중간선인 15조 원으로 잡았을 때 가구(4인 가족 기준)당 125만 원씩을 부담해야 한다. 그리 큰돈은 아니라고?
대통령이 싱글벙글했던 바로 그 국무회의에서 정부는 취사 및 난방용 액화천연가스(LNG) 특소세를 kg당 40원에서 60원으로 50% 올렸다. 이것만으로도 서민의 올 겨울나기는 더 힘들어질 것이다. 이를 알기나 하는지,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북한의 경제 발전을 도울 수 있는 (별도의) 포괄적 계획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장기적으로 에너지 물류 운송 통신 인프라가 중요하니 정부가 체계적인 협력 계획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도 했다. 별도의 대북 지원까지 하게 된다면 국민의 부담은 더 늘어날 것이다.
‘평화 비용’이라면 어느 정도는 감당해야 한다. 다수 국민도 대북 지원의 필요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이런 식은 곤란하다. 모호성으로 가득 차, 언제 폭발할지 모를 뇌관과도 같은 게 베이징 공동성명이다. 이 한 장의 성명을 위해 천문학적인 지원을 약속하고 돌아와서도 국민의 양해를 구하기는커녕 서로 “잘했다”고 추어주기 바쁜 그들을 위해 누가 선뜻 얇은 지갑을 열려고 하겠는가. 정 장관의 지갑은 얼마나 두꺼운가.
노 대통령이나 정 장관은 좀 더 진중(鎭重)해야 한다. 북핵 위기를 본격적인 협상 국면으로 돌려놓은 것은 좋은 평가를 받을 만하나 이제 겨우 첫발을 뗐을 뿐이다. 히말라야 등반으로 치면 베이스캠프를 차린 정도다. 눈앞엔 수천 m의 험봉(險峰)이 여전히 버티고 있다.
얼굴에서 웃음을 거두고 세금 내는 국민의 고통부터 헤아려야 한다. 한 푼이라도 덜 부담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경수로 제공이 기정사실화됐는데도 200만 kW 전력 지원을 꼭 해야 하는지, 그래도 전력을 줘야 한다면 다른 에너지(중유) 공급에서 우리는 빠져야 되는 것이 아닌지, 단지 미국의 체면 때문에 공사가 중단된 신포 경수로를 포기하고 새 경수로를 지어 줘야 하는 것이라면 미국을 설득해 신포 경수로로 대체할 수는 없는 것인지, 이런 문제들부터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돈 주고 얻는 ‘평화’ 못지않게 국민의 세금 고통을 덜어 주는 일도 값지고 귀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재호 수석논설위원 leejae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