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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대한민국/21세기 新고전 50권]사회정의론

입력 | 2005-09-26 03:06:00


현대의 정치철학 분야에서 존 롤스의 ‘사회정의론’만큼 격찬을 받은 책은 없었다. 1971년에 출간되자마자 세계의 지성계는 오랜만에 활기찬 지성 담론을 펼쳤다. 담론의 장에는 서로 질시만 하던 좌우익의 지성인들이 지적 위선을 벗어던지고 모여들었고, 자신의 영역 안에만 웅크리고 앉아 있던 다양한 지성인도 전공 영역의 담장을 헐어 버렸다.

그러자 정치철학의 르네상스가 도래했다는 환호성이 터졌다. 사실상 1950, 60년대에 정치철학은 사망했었다. 당시 정치철학자들 스스로 “정치철학은 죽었다”고 고백할 정도였고, 어느 정치철학자는 절망하여 아예 연구 분야를 바꿀 정도였다.

돌이켜 보면, 정치철학은 20세기에 들어서자마자 사망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때 영미의 지성계에서는 논리실증주의가 휩쓸었고, 유럽 대륙의 지성계는 현상학이 지배했다. 방법은 달랐지만, 이들은 모두 진리 인식의 확실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 라는 가치판단 문제는 철학이 다룰 수 없다고 도외시하였다.

그러기에 반문명적인 세계대전이 두 번씩이나 일어나도, 그들은 지성인의 임무인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없었다. 전후에 시민권 운동, 학생 운동, 반핵반전 운동이 줄기차게 일어나도 속수무책이었다. 가치판단 문제를 회피하였으므로 결과적으로 규범 허무주의에 빠졌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서구 사회운동의 비판적 상상력은 한국의 1980년대처럼 좌파 지성들이 주로 제공했다. 좌파 지성은 사회 비판의 준거점에 대한 철학적인 검토를 소홀히 한다. 그렇게 하면 사회 비판은 그저 개인 또는 집단의 신념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주관적인 신념에 의존했으므로 좌파 지성 또한 규범 허무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세계대전이나 세계 냉전은 규범 허무주의가 육화된 모습이다. 규범 허무주의는 실천적인 사회문제를 힘의 논리로 환원시켜 버린다. 사회 갈등은 이제 잠정적인 타협 이외에는 평화적으로 해결할 길이 없다.

‘사회정의론’은 규범 허무주의를 극복하려는 철학적인 몸부림이었다. 여기에서 사회 실천 원리로 주장된 것은 세 가지이다. 첫째 평등한 자유의 원칙, 둘째 기회 균등의 원칙, 셋째 차등의 원칙이다. 사회를 공정하게 운영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평등한 자유를 보장해야 하고, 평등한 자유의 원칙이 충족되면 그 다음에 기회 균등을 보장해야 한다. 기회 균등의 원칙이 충족되면 그 다음에 차등의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차등의 원칙은 사회 불평등을 규제하는 것이다. 사회 불평등은 사회의 최소 수혜자에게 이익이 될 때에만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주 당연하고 간단해 보이는 롤스의 주장을 사회주의자들은 매우 불평등주의적이라고 비판했고 자유주의자들은 너무 평등주의적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사회당은 롤스의 ‘차등 원칙’에 입각한 분배 정책을 공식 정책으로 채택하기도 했고 미국의 자유주의자들은 그를 비판하면서도 절대로 버리려고 하지 않았다.

사회계약론의 관점에서 펼쳐진 롤스의 주장은 이렇게 현대 실천이성의 진면목을 드러내고 있다. 더더욱 매혹적인 것은 그의 철학 작업이 여러 분야의 학문 성과를 총괄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대인이 실천이성을 넉넉하게 닦아 나가기에는 더없이 훌륭한 정치철학서임에 틀림없다.

김주성 한국교원대 교수 정치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