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꽃’ 앞에 선 중견 서양화가 김홍주 씨. 가느다란 붓으로 세밀하게 그리는 것이 특징인 그의 유화작품은 첨단 테크놀로지로 무장된 영상 이미지의 홍수시대에 ‘노동과 수공’의 산물로서의 그림 본연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한다. 사진 제공 로댕갤러리
《중견 서양화가 김홍주(60·목원대 미술교육과 교수) 씨는 첨단 테크놀로지로 무장된 영상 이미지의 홍수시대에 ‘노동과 수공’의 산물로서의 그림 본연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하는 작가다. 큰 캔버스에 가느다란 붓으로 세밀하게 그리는 것이 특징인 그는 유화 작품 한 점 제작에 몇 달씩 공을 들인다. 세필의 무수한 반복적인 터치로 대형 화면을 가득 채워 나가는 작가의 작업은 변화나 유행에는 무심한 치열한 장인정신을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느리고 고집스러운 그의 작업방식은 단지 사물의 정밀함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는 지난 30여 년 동안 어떻게 그리느냐보다 무엇을 그리느냐에 더 치중해 왔다. 그의 그림은 실제로 우리가 보는 사물이 과연 눈에 보이는 그대로인가라는 다소 철학적인 주제를 담고 있다. 이번 개인전 제목 ‘이미지의 안과 밖’은 여기서 유래됐다.
그는 시간의 흔적이 역력한 화장경대, 창문, 다양한 인물, 들판 풍경 등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하긴 하지만 원근과 명암을 무시하고 종횡으로 배치해 마치 초현실주의자들의 그림처럼 보인다. 전시장 입구에서 만나는 1993년 작 ‘무제’는 작가의 이런 생각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가로 460cm, 세로 235cm에 달하는 대형 캔버스 한가운데 작가가 촘촘히 그린 넓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다. 잔디 하나하나를 셀 수 있을 것처럼 그려 멀리서 보면 벽에 진짜 잔디가 심어져 있는 것으로 보일 정도다. 그는 이 잔디밭을 중심으로 그림 곳곳에 다양한 건물, 인물, 호수, 강,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관조하는 듯한 작가의 자화상을 그려놓았다.
그림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마치 부조리와 역설로 가득한 우리네 삶의 모습처럼 느껴진다. ‘현실’이라는 실재하는 (혹은 실재한다고 느끼는) 공간은 우리가 만나는 잔디밭처럼 치밀하고 촘촘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잔디밭을 규칙 없이 가로지르는 인물들과 풍경처럼 빈틈과 무질서로 가득하다는 메시지 말이다.
그의 이런 작업들은 언뜻 보면 평범한 산하나 개펄을 그린 것이지만, 멀리서 보면 모나리자나 메릴린 먼로의 얼굴 이미지를 드러내는 그림들, 그리고 한자(漢字) 글씨를 덩어리처럼 한자 한자 뭉개 흐릿하게 묘사하는 작업에서도 확인된다. ‘글자’라는 가장 명확한 이미지를 해체하려는 실험적인 시도다.
작가는 90년대 후반 ‘꽃’과 ‘과일’이라는 소재에 치중하면서 작품세계에 일대 변혁을 기했다. 장인적인 세필(細筆) 작업의 특성을 살려 잎맥까지 살아 있는 듯한 그의 꽃 그림은 만지고 싶고 냄새 맡고 싶다. 초록 호박, 분홍 난초 등 다양하고 커다란 꽃들 앞에 서면 마치 꽃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다. 우리 몸이 한없이 작아지고 작아져서 저 꽃 속을 이리 저리 헤매다 그림 속의 일부가 되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서울 중구 태평로 로댕갤러리에서 10월 30일까지 열리는 그의 개인전에는 1980년대 후반 풍경화부터 이런 꽃의 이미지를 담은 작품들까지 40여 점이 나온다. 근작들인 가지, 딸기, 오동잎, 나팔꽃 등도 나온다. 10월 6일, 22일 오후 7시에는 음악회도 열린다. 02-2259-7781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