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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대한민국/21세기 新고전 50권]노자이야기

입력 | 2005-09-27 03:13:00


진리를 말하는 책은 많지만 진리를 어떤 틀에 가두거나 왜곡하지 않는 책은 드물다. 후자의 미덕을 갖춘 예로 나는 먼저 노자의 ‘도덕경’을 떠올린다. 도덕경에 대한 다양한 주해와 대화가 오늘까지 이어져 오는 것도 그 현묘(玄妙)한 품 덕분이다.

노자 자신의 비유를 빌리자면, 그것은 가장 낮아 만물이 모여드는 골짜기(谷神)이자 텅 비어 있는 그릇과도 같다. 무엇이든 담아낼 수 있고, 담긴 내용물에 따라 스스로 모양을 자유자재로 바꾸는. 한편 ‘도덕경’에 관해서 말한 책은 많지만, 그 열려 있는 정신을 깊이 체화한 책은 드물다.

그런 점에서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이야기’는 ‘도덕경’의 아름다운 번역본이자 그것을 원텍스트로 한 풍부한 대화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원주에서 40여 년 동안 가톨릭농민회와 한살림운동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의 정신적 스승이 되었던 장일순 선생과, 개신교 목사로서 좁은 종교적 틀을 벗어나 다양한 집필활동을 해 온 이현주 목사가 그 대화의 주인공들이다. 따라서 이 책은 신교와 구교 간의 대화이자, 성서적 진리가 도교와 불교 등과 어떻게 통하는가를 잘 보여 준다는 점에서 동서 간의 대화이기도 하다.

원래 1990년대 중반 세 권의 책으로 출간되었던 것을 합본하고 다시 손보아 나온 이 책은 700쪽이 넘는 분량과 함께 거기에 흘러드는 사상의 지류 또한 방대하다. 노자가 깊은 종교적 본질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굳이 의식하거나 도그마화하지 않았듯이, 노자를 가운데 두고 이루어지는 사제 간의 대화 또한 그러하다. 현학적인 취미나 자구적 해석에 매달리지 않고, 삼라만상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와 읽는 사람을 적신다.

그래서 ‘도덕경’ 81장에 각각 붙여진 대화를 읽다 보면 볕이 잘 드는 방에 두 분이 고요하게 마주 앉아 있는 풍경이 떠오르고, 어느새 나도 그 옆에 숨죽이고 동석해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마치 불이 타오르는 등잔에서 꺼져 있는 등잔으로 불꽃이 튀는 것처럼 두 분의 대화는 읽는 이에게도 서늘한 불꽃을 옮겨 준다. 이때 전달되는 것은 어떤 메시지가 아니라 살아 있는 정신의 에너지이다. 또한 문자로 이루어진 책의 형태를 입고 있되, 언어를 넘어선 생명의 훈기 같은 걸 이 책은 거느리고 있다.

김지하 시인은 장일순 선생을 두고 ‘하는 일 없이 안 하는 일 없으시고 달통하여 늘 한가하시며 엎드려 머리 숙여 밑으로 밑으로만 기시어 드디어는 한 포기 산속 난초가 되신 선생님’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사실 이 책이 완결된 것은 장일순 선생이 세상을 떠나고 난 뒤의 일이다. 57장까지는 선생이 생전에 계실 때 녹음된 것을 정리한 것이지만, 그 이후는 이현주 목사가 “내 속에 계신 선생님과 대담하면서 받아 적는 심정으로” 써 내려간 것이라고 한다. 그야말로 삶과 죽음을 넘어선 영적 대화인 셈이다. 장일순 선생이 가신 지도 10년이 넘었다.

하지만 이 책 속에, 그리고 수많은 사람의 정신 속에 여전히 살아 계신 그분의 흔적을 보며 ‘살아 있는 고전’이라는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노자라는 강을 건너기에 이만한 ‘말씀의 뗏목’을 나는 알지 못한다.

나희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