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박순철
“보름이면 수양(휴陽)까지 대군을 이끌고 달려갔다 오기에도 그리 넉넉하지 못한 날수이다. 그런데도 바람같이 나타나 치고 빠지는 팽월을 잡고 돌아오겠다니 도대체 저 사람은 자신을 누구로 여긴다는 것이냐?”
“그 자부심이 오늘날의 패왕을 만들었지만, 앞날의 패망이 또한 거기서 비롯되겠지요.”
한왕의 탄식을 부러움에서 나온 걸로 보았는지 진평이 그렇게 빈정거리듯 받았다. 한왕이 갑자기 그런 진평에게 매달리듯 물었다.
“그렇다면 호군(護軍)에는 성고성을 떨어뜨려 자만에 찬 항왕을 낭패시킬 좋은 계책이 있는가?”
“성고성을 떨어뜨리는 일은 멀리 있는 항왕이 아니라, 성안에 있는 조구나 사마흔을 살펴 계책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진평의 그와 같은 대답에 한왕이 다시 한번 매달리듯 말했다.
“그런 계책이 있다면 어서 말하라. 조구를 성 밖으로 끌어내 사로잡을 수만 있다면 과인은 무슨 말이든 따르겠다.”
그러자 한동안 뜸을 들이던 진평이 조심스레 말했다.
“조구나 사마흔처럼 하찮은 벼슬에서 몸을 일으킨 자들에게는 두 가지 같은 병통이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의 평판에 얽매여 남의 이목을 두렵게 여기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자질구레하지만 거듭된 성공으로 자라난 오기입니다. 특히 조구와 사마흔은 두 사람 모두 시골의 옥리(獄吏)에서 몸을 일으켜 왕후(王侯)의 줄에까지 끼어 서게 되었으니 그 병통은 남보다 훨씬 더할 것입니다. 대왕께서 그들의 그와 같은 병통을 도지게 하시면 성고성을 얻기는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들의 병통을 도지게 할 수 있는가?”
“우선은 병졸들을 시켜 그들을 욕하게 하시되, 이전과는 달리 그들의 신의나 위엄과 관련된 평판을 깎아내리고 오기를 건드리는 말을 골라야 합니다. 그래도 안 되면 에움을 풀고 물러나시면서 군사들로 하여금 깃발을 질질 끌고 항오(行伍)를 흩게 하여 저들이 그동안에 얻은 병가(兵家)로서의 평판과 오기를 건드려 보십시오. 저들은 반드시 성문을 열고 나와 싸우게 될 것입니다.”
그 말에 한왕이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석연찮은 표정으로 말했다.
“과인도 사상(泗上)의 정장(亭長)에서 몸을 일으켰으니 그 벼슬의 하찮음이 포의(布衣)나 다름없다. 그러나 장부가 큰 뜻을 펴려 하면 한때의 욕된 평판을 겁내거나 되잖은 오기로 시세와 맞서서는 아니 된다 믿고, 또 그리해 왔다. 그런데 저들이라고 그걸 모르겠느냐?”
그때 한왕과 진평이 주고받는 말을 한동안 듣고만 있던 장량이 가만히 끼어들었다.
“그것은 또 대왕께서 대왕이 되신 까닭이요, 장차 천하를 얻을 밑천이 될 것입니다. 사람마다 따라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물며 조구 따위겠습니까.”
그 말에 한왕의 얼굴이 치켜세워진 아이처럼 환해졌다. 그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소. 당장부터라도 그렇게 해봅시다.”
글 이문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