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으려면 빨리 죽든가.”
탤런트 손현주(40)는 생각한다. 이 대사 아프다. 대충 갈까. 그래도 마음 독하게 먹는다. 그 순간은 조강지처 버리고 바람 난 남자 ‘반성문’이 돼야 한다. 그래서 나 죽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울부짖는 아내 맹순이한테 눈 하나 깜짝 않고 던진 말이다.
KBS2 수목 미니시리즈 ‘장밋빛 인생’(극본 문영남·연출 김종창)의 인기가 뜨겁다. 지난달 24일 첫 회부터 지금까지 지상파 3사 수목드라마 1위를 고수하고 있다. 그간 전체 시청률에선 2위였는데, 22일 시청률 32.6%(TNS미디어코리아 집계)를 기록해 1위에 올랐다. 마누라가 위암 말기인 것도 모르고 남편은 악담을 퍼붓기만 하고 어떻게든 애인과 함께 살 궁리만 하는 내용이었다.
○ 내가 생각해도 나쁜 놈… 나라면 안 그래
수원 KBS드라마센터에서 만난 손현주는 자신이 연기하는 반성문이라는 남자를 두고 “정말 나쁜 놈”이라고 했다. 연기자들은 악역이라 해도 자기 역할을 이해하고 감정을 겹쳐보려고 한다.
그런데 그는 “반성문은 지금 정신 나간 상태”라고 잘라 말했다. “맹순이가 제 몸 아끼지 않고 얼마나 열심히 살아 왔는데, 그런 마누라를 떠나다니요. 저라면 절대로 안 그럴 겁니다.”
‘일탈’ 하면 대부분 40대 남성을 떠올린다. 손현주 역시 40대에 들어섰다. 그는 “우리나라 40대 남자는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집 한 채 장만하려고 10여 년을 매달리고, 처자를 먹여 살려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주변을 둘러봐도 일탈할 정도로 돈과 시간이 남아도는 40대는 많지 않아요.”
그렇지만 반성문이 돈과 시간이 남아도는 건 아니지 않으냐고 물었다. “그러니까 쫄딱 망하죠.” 반성문은 그렇게 푹 빠졌던 애인 오미자한테 사기 당하고 직장에서도 쫓겨난다. 그제야 아내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헌신적인 아내를 향해 “나 진짜 너한테 질렸다” “죽어도 절대 연락하지 마” 같은 잔인한 대사를 할 때 손현주는 괴롭다고 했다.
“극중에서 자기 자식들은 나 몰라라 하고 애인 아들 맡겠다고 할 때가 제일 힘들었어요. 나도 자식이 있는데….”
그에겐 초등학교에 들어간 딸과 세 살 난 아들이 있다. 연기자가 이런 마음인데 시청자들은 오죽 할까. 시청자게시판은 ‘보면 볼수록 화가 난다’ ‘너무 잔인해서 가슴이 아프다’는 평이 이어진다. 어느 날 장인이 전화해서는 “혼날지도 모르니 주부들이 많이 오는 슈퍼마켓엔 가지 마라”고 했다. 그만큼 연기가 실감난다는 얘기다.
○ 식당 아줌마 미움 사서 밥도 못 먹어요
그는 식당 아줌마들의 미움을 사서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다고 작가에게 하소연했다. 작가는 다음 주 방송분 대본에 ‘손현주 씨, 이제 아줌마들이 밥 잘 줄 거예요’라고 적어 놓았다. 작가가 메모한 곳은 아내가 병에 걸렸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 눈물을 뚝뚝 흘리는 장면이다.
손현주가 이렇게 ‘정말 나쁜 놈’을 연기하는 것은 처음이다. 그동안 자동판매기 관리인, 구멍가게 점원 같은, ‘의상을 따로 준비하지 않아도 되는’ 역할을 많이 맡았다. 소박한 ‘소시민’ 이미지만 자기 것인 줄 알았는데 이번에 180도 변신을 하게 됐다.
“그간의 이미지도 배신한 셈이고, 드라마도 조강지처 배신하는 역할이고…. 반성문은 이제 다시 한번 ‘배신’하게 됩니다. 완전히 달라져서 아내를 헌신적으로 간호해요. 진짜 눈물이 어떤 건지 보여드릴 겁니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