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나 한 잔 하면서 이야기하시지요.”
신영복(경제학) 성공회대 교수는 무작정 강의실로 찾아간 나에게 자판기 커피를 뽑아 권하며 빈 강의실로 안내했다. 2년 전 당시 신문기자였던 나는 ‘지성의 나무’라는 기획 기사를 취재 중이었다.
“번거롭게 먼 길을 오셨군요.”
그날은 햇살이 따사로웠다. 창밖에 봄볕을 화사하게 받고 서 있는 꽃나무가 보였다. 무슨 꽃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그때 문득 풍겨 오던 은은한 향기는 지금도 또렷이 느낄 수 있다. 처음엔 그 향기가 창밖의 ‘꽃내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손에 묻어날 정도로 짙게 퍼져 오는 그 향기는 신 교수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인간에게서 그런 깊은 ‘인품’의 향기가 물결처럼 번져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과학적 사고보다 더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은 바로 대상과 필자의 ‘관계’라 생각합니다. 대상과 필자가 어떠한 관계로 연결되는가에 따라서 얼마만큼의 깊이 있는 인식이, 또 어떠한 측면이 파악되는가가 결정됩니다. 이를테면 대상을 바라보기만 하는 관계, 즉 구경하는 관계 그것은 한마디로 ‘관계 없음’입니다.”(‘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에서)
옥중 서간집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그는 ‘관계’를 이야기했다. 이 책은 그가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돼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20년 20일 복역한 뒤 1988년 출소한 직후에 발간됐다. 민주적 정권 교체에 실패해 허탈해하던 그 시절에 그 책은 한국 사회에 잔잔한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편지는 계수, 형수, 부모님에게 보내진 것이었지만, 그 안에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진심 어린 성찰이 담겨 있었다.
“멀리 두고 경원하던 사람도 일단 같은 방, 같은 공장에서 베 속의 실오리처럼 이런저런 관계를 맺게 되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관점이 열립니다. … ‘관계’는 ‘관점’을 결정합니다. … 사람은 그림처럼 벽에 걸어놓고 바라볼 수 있는 정적(靜的) 평면이 아니라 ‘관계’를 통하여 비로소 발휘되는 가능성의 총체이기에 그렇습니다.”(같은 책)
그의 옥중 20년은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 운동이 가장 치열하던 시기였다. 가족과 동료 재소자 그리고 한국 사회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곳곳에 배어 있는 그의 글은 사람들이 치열한 실천에 몰두하다가 때때로 잊곤 하는 사실, 즉 ‘나는 왜 이 길을 가고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 문제의식을 다시 일깨워줬다. 민주화에 성공했든 실패했든, 지역구도를 타파하든 못 하든, 세계화를 하든 안 하든, 더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은 직간접적으로 인연 맺는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완성돼 간다는 사실, 그리고 그런 ‘관계’ 속에서 사회와 역사가 만들어진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훌륭한 사상을 갖기 어려운 까닭은 그 사상 자체가 무슨 난해한 내용이나 복잡한 체계를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사상이란 그것의 내용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 실천됨으로써 비로소 완성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생활 속에서 실현된 것만큼의 사상만이 자기 것이며, 그 나머지는 아무리 강론하고 공감하더라도 결코 자기 것이 아닙니다.”(같은 책)
돌이켜 보면, 그에게서 번져 오던 향기는 그의 글을 읽으면서 이미 느꼈던 것인 듯하다.
김형찬 고려대 교수·한국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