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훈 대법원장이 취임사에서 권위주의 시대에 있었던 사법부의 불행한 과거를 언급한 이후 전국 법원이 시국사건 판결 기록을 파악하고 있다. 이 대법원장은 취임 기자회견에서 사법부의 과거사 정리 작업에 외부 인사를 참여시키지 않고 인적 청산도 없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러나 ‘이용훈 사법부’의 첫 작업이 과거사 정리로 시작되는 데 대해 정치권력의 과거사 청산과 코드를 같이하는 것이 아닌가 우려하는 시각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 사법부는 유신시대와 5공화국을 거치며 시국 관련 사건에서 정권의 압력으로부터 재판의 독립을 지켜 내지 못한 부끄러운 유산을 갖고 있다. ‘사법살인(司法殺人)’이라고 불리는 ‘인혁당 사건’ 피고인들에 대한 사형 판결 같은 것이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실정법에 따른 판결이었다고는 하지만 정치권력과 정보기관의 주문에 따른 ‘정찰제 판결’ 또는 ‘반(半)타작 판결’의 논란이 그치지 않았다. 재판기록이 멸실(滅失)되기 전에 법원이 이를 수집하고 분류해 연구자료로 제공하고, 사법권이 침탈당한 불행한 역사를 반추(反芻)해 교훈으로 삼는 일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일부 시민단체와 재야 법조단체는 이번 14대 대법원장 임명 절차를 앞두고 ‘대법관 경력이 있는 인사는 사법사(史) 왜곡의 공범’이라는 논리로 대법관 출신이 대법원장에 임명돼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폈다. 3공화국에서 법관이 돼 1994년 대법관에 오른 이 대법원장도 과거사의 오욕(汚辱)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용훈 사법부’가 이러한 바람몰이식 과거사 청산에 휘말리게 되면 사법부의 안정을 해치고 재판의 독립성이 침해당하는 사태를 부르게 된다.
이 대법원장은 정치권력과 주변 단체 쪽에서 불어오는 외풍(外風)으로부터 사법부의 안정과 독립을 지켜 낼 책무가 있다. 사법부의 과거사 정리가 자료 수집과 자기반성의 범위를 넘어 정치적 의제로 변질돼서는 결코 안 된다. ‘이용훈 사법부’는 중대한 시험대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