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의 힘은 열정적인 관객들로부터 나온다. 지난해 영화제의 세계 페스티벌 한마당에 참여한 관객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올해로 부산국제영화제(PIFF·Pus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10월 6∼14일)가 10돌을 맞는다. 국제영화제의 ‘후발주자’라는 약점을 딛고 일어나 아시아 최고, 최대의 영화제로 자리 잡은 영화축제다. 올해 영화제의 새롭고 풍성한 상차림과 지난 10년을 이끌어 온 주역을 조명한다.》
제10회 부산국제영화제(PIFF)는 역대 최대 규모인 73개국 307편의 영화가 해운대 수영만 요트경기장 내 야외상영장과 메가박스, 프리머스 시네마 및 중구 남포동 일대 부산극장과 대영극장 등 총 5개관에서 선보인다. 선택의 폭이 넓어진 만큼 관객들로선 어떤 작품을 고를 것인지 행복한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올 영화제의 주목할 만한 작품들과 행사를 소개한다.
○ ‘쓰리 타임즈’ ‘더 차일드’ 등 놓치면 후회
올해 칸 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진출작인 허우샤오셴(대만) 감독의 ‘쓰리 타임즈’가 기존 120분에서 135분짜리로 재편집되어 개막작으로 선보인다. 금년 칸 영화제에 초청돼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은 장피에르와 뤼크 다르덴 형제(벨기에)의 ‘더 차일드’를 비롯해 짐 자무시(미국)의 ‘브로큰 플라워’, 자유분방한 형식을 보여 주는 스즈키 세이준(일본)의 ‘오페레타 너구리 저택’, 라스 폰 트리에(덴마크)의 ‘만덜레이’ 등도 거장의 손길을 느낄 수 있는 작품들. 이란 모센 마흐말바프 감독의 ‘섹스와 철학’과 홍콩 출신 스탠리 콴의 ‘장한가’ 등은 아시아 대표 감독들의 신작이다.
○ 이만희 감독 ‘휴일’-‘로보트 태권V’ 공개
한국 대중영화와 작가영화의 접점에 선 상징적 인물인 이만희 감독을 기념하는 ‘이만희 감독 회고전’이 열린다. 일반에게 최초로 공개되는 미발표작 ‘휴일’을 비롯한 10편이 선보인다.
영국특별전에서는 복잡한 수와 기호로 영화를 구성하는 ‘스크린의 수학자’ 피터 그리너웨이와 진보적 성향의 켄 로치 등 세계적 감독들의 대표작 등 11편이 관객들을 만난다.
한국 애니메이션의 전설로 남아 있는 만화영화 ‘로보트 태권V’는 수영만 요트경기장 야외 상영장에서 ‘오픈 시네마’의 프로그램으로 공개된다. 영화진흥위원회가 3년여간의 디지털 복원작업 끝에 내놓았다.
○ 스즈키 세이준 감독-청룽 등 만나
개막작 ‘쓰리 타임즈’의 허우샤오셴, 폴란드의 거장 크시슈토프 자누시, 일본 폭력 미학의 대가 스즈키 세이준, 이란의 거장 아바스 키아로스타미, 태국의 아삐차뽕 위라세타꾼, 프랑스의 장자크 아노 등 세계적인 감독들이 영화제를 찾을 예정.
허우샤오셴은 아시아 17개국에서 선발된 28명의 영화학도가 모여 워크숍을 갖는 아시아영화아카데미(AFA)의 초대교장을 맡았다. 뉴커런츠 부문 심사위원장이기도 한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마스터 클래스를 연다. 이 밖에 김희선, 강동원, 하지원, 차승원, 한석규, 청룽, 장첸, 비비안 쉬, 쓰마부키 사토시와 같은 국내외 스타배우들이 무대인사 등을 통해 관객을 만난다.
○ ‘GV’티켓 있으면 감독-배우와 질의응답
부대행사와 편의시설을 잘 알아두면 영화제의 재미가 배가된다. 티켓에 ‘GV(Guest Visit)’란 표시가 있으면 영화 관람 직후라도 자리를 뜨지 말 것. 감독과 배우가 나와 무대인사를 하고 질의응답시간도 갖는다.
유명 감독과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보는 기회도 있다. 김지운 송해성 정지우 등 8명의 감독이 참석하는데 올해는 배우 유지태 문소리도 참여해 ‘감독·배우와 함께 영화 보기’로 확대됐다. 해운대 메가박스가 있는 건물 ‘스펀지’의 옥상에는 무료로 음료를 마시며 영화제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관객카페가 마련된다. 운이 좋으면 폐막식에서 영화감독이나 배우들과 맥주잔을 부딪칠 수도 있다. 1만1000원짜리 티켓을 구입하면 폐막작(‘나의 결혼 원정기’)을 보고 나서 5000여 명이 참여하는 폐막파티에서 무료로 제공되는 맥주를 즐길 수 있다. 개폐막작의 인터넷 예매는 이미 끝났지만 200장을 현장에서 판매한다. 이미 매진된 영화라도 임시매표소의 환불창구를 뒤지다 보면 ‘행운’을 만날 수도 있다. 영화제 홈페이지(www.piff.org) 참조.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열정의 자원봉사자-마니아-폐인들이 ‘세계적 축제’ 이끌어▼
1996년 9월 14일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PIFF)의 개막식 이튿날. 야외극장에서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어둠 속의 댄서’를 상영하기로 예정된 날인데 낮부터 비가 주룩주룩 쏟아졌다. 주최 측은 ‘상영 취소냐, 강행이냐’를 놓고 망설였다. 고민 끝에 ‘예정대로 상영하되, 원하는 관객에겐 환불해 주겠다’고 공지했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3000여 관객이 하얀 비옷을 입은 채 미동도 않고 영화를 관람하는 모습을 지켜보는데…. 영화가 슬프기도 했지만, 영화가 끝난 뒤 보니까 주최 측인 우리는 물론 관객들의 얼굴도 눈물인지, 빗물인지 온통 범벅이 돼 있더군요.”
제1회 때부터 지금까지 10년째 이 영화제의 프로그래머로 활동해 온 김지석(45) 씨는 아직도 ‘그때’만 떠올리면 가슴이 울렁거린다. 해외에서 온 영화인들이 “전 세계 어디서도 이런 열정적 관객들은 본 적이 없다”고 혀를 내둘렀던 그 관객들은 바로 부산국제영화제 10년을 이끌어 온 힘이다.
○ 김동호 집행위원장 10년째 지휘
PIFF의 얼굴격인 김동호(68) 집행위원장, 그와 함께 영화제의 산파 역할을 한 이용관(50) 부집행위원장, 김지석 전양준(46) 프로그래머는 오늘이 있기까지 10년간 생사고락을 함께해 왔다. 이들은 ‘맨땅에 헤딩하기’식으로 국내 최초의 국제영화제를 출범시키고, 세계의 주목받는 영화제로 발전시킨 주역.
하지만 이들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영화제의 주체는 부산 시민과 관객들”이라고 입을 모은다. 영화계에서는 아무도 이 말에 토를 달지 않는다. 올해도 550명의 영화제 자원봉사자를 뽑는데 3155명이 몰려들었다. 1회부터 10회째인 올해까지 자원봉사자로 참여하는 김삼생(73·부산 사하구 괴정1동) 씨는 “처음엔 영화도 보고 좋은 일도 해 보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참여했지만 지금은 세계적인 영화제에 힘을 보탠다는 자긍심으로 일한다”고 말했다.
올해 영화제의 예상 관객은 18만 명. 23일 표 예매가 시작된 뒤 28일 현재 45편의 표가 매진됐으며 한 인터넷 경매 사이트의 인기 베스트 순위는 영화제 표들이 휩쓸고 있다.
○ PIFF 마니아, PIFF 폐인
영화평론가 심영섭(39) 씨는 “만일 부산영화제가 없었다면 지금처럼 영화 일을 하면서 살겠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초창기 관객으로 영화제를 찾았던 그는 영화제를 통해 영화에 빠져들었고 영화제와 함께 비평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
한 해도 빠짐없이 영화제를 찾는 PIFF 마니아가 많은 만큼 관객 수준도 높다. 몇 해 전 영화제를 찾은 기타노 다케시 감독은 “일본과 달리 부산영화제의 관객들은 내가 어떤 장면을 어떤 의도로 찍었는지 콕 집어내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