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 개정이라고 하는 것은 어린애 팥떡 주워 먹듯이 그때그때에 따라서 필요할 때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1952년 6월 27일자 국회 속기록에 실린 이충환 의원의 개헌 반대 토론이다. 전쟁의 화염 속에서 임시 수도 부산은 이승만 대통령의 재선 보장을 위한 직선제 개헌 공작으로 분주했다. 결국 국회는 경찰과 군대가 의사당을 포위한 가운데 이른바 ‘발췌개헌안’을 변칙적 기립투표로 통과시키고 만다.
9번이나 팥떡을 주워 먹고서야 국민은 깨닫게 된다. ‘좋은 헌법’은 ‘좋은 정치’의 결과물일 뿐, ‘좋은 헌법’이 반드시 ‘좋은 정치’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최장수를 누리고 있는 1987년 헌법을 일컬어 1노 3김의 정략적 타협 결과물이라거나, 그 역사적 사명을 다했으니 이제 폐기하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지만, 정치권의 ‘개헌 자가발전(自家發電)’에 대한 국민의 반응은 냉담한 것 같다. 정치세력 간의 타협 결과물이 아닌 헌법이 어디 있는가. 헌법이 그저 정치 ‘약발’ 떨어질 때마다 갈아 끼우는 1회용 건전지인가.
대통령 임기를 5년 단임에서 4년 중임으로 변경하잔다. 책임정치를 실현하고 레임덕을 막자는 것이다. 첫 4년의 임기가 재선을 위한 선심 행정으로 과열되고, 현직 대통령이 인력 물력을 총동원하여 선거에 임하게 되는 문제점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가. 두 번째 4년 임기의 말미에 레임덕은 어차피 발생하게 되어 있다. 4년마다 교대로 ‘열탕’과 ‘냉탕’을 오가는 제도가 5년마다 ‘냉탕’에 들어가는 제도보다 더 좋을 것은 무엇인가.
대통령 선거에서 결선투표를 배제하는 상대다수제가 문제란다.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인 다수결에 충실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과반수 득표를 당선 요건으로 하면서 이에 미달할 때 1, 2위간 결선투표를 실시하는 방식은 선거비용을 현저히 증가시킨다. 유력 후보의 과반수 득표를 저지해 주는 대가로 ‘자리’ 등을 보장받는, 이른바 ‘훼방 출마(spoiler candidacy)’를 조장하기도 한다. 결국 정치비용 증가와 정파 분열 악화의 비싼 값을 치를 수 있다.
부통령을 러닝메이트로 뽑는 방식을 도입하잔다. 부통령 자리를 지역구도의 완화 수단으로 활용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부통령 후보로 나서려면 지역기반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니 결국 정치의 지역 의존성을 도리어 강화할 가능성이 커진다. 예컨대 강원도나 제주도 출신의 정치인은 부통령 후보로 ‘간택’되기 어렵지 않겠는가. 대통령 선거에 어차피 지역성이 작용한다면 ‘단식’이든 ‘복식’이든 무엇이 그리 다르겠는가.
권력구조를 통째로 바꾸어 의원내각제로 가자는 소리조차 들린다. 내각제가 좋은가, 대통령제가 좋은가. “어머니가 좋으냐, 아버지가 좋으냐”는 식의 유치한 질문을 건국 반세기가 훨씬 지난 이 시점까지 여전히 되풀이하고 있다니! 국민이 직접 지도자(대통령)를 선택하게 할 것인가, 정치인(의원)을 통해 지도자(총리)를 간접 선택하게 할 것인가. 국민은 이미 오래전에 “내 손으로 뽑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항상 그래 왔듯, 내각제 개헌론이란 ‘대통령감’을 못 가진 정치집단이 그 불안심리를 헌법으로 분칠하려는 주장일 뿐이다.
물론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 불일치에 따른 불규칙 순환은 가급적 수정해 주는 편이 좋다. 단, 이 경우도 대선과 총선을 동시선거로 할 것인지 교차선거로 할 것인지는 신중히 검토해야 할 문제다. 동시선거가 잇따른 선거의 부담을 줄이고 대통령의 의회 다수의석 확보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여소야대’가 되었을 때 ‘고통의 기간’은 대통령의 전 임기로 연장되기 때문이다. 또 대통령 단임제 하에서는 교차선거가 일종의 ‘중간평가’ 역할을 하는 긍정적 측면도 있다.
요즘 ‘개헌 카드’ 운운하는 기사 제목을 볼 때마다 헌법 전공 교수의 마음은 아프기 그지없다. 평생을 바쳐 연구하는 대상이 정치 포커 판의 한낱 카드짝에 불과하다니! 미국 헌법의 아버지 알렉산더 해밀턴이 ‘페더럴리스트 페이퍼’에서 인용한 시구가 새삼 떠오른다. “정부 형태에 관해서는 바보들이나 논쟁하게 하라. 가장 잘 통치된 정부가 가장 훌륭한 정부이거늘.”
신우철 영남대 교수·헌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