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줌인]기수로… 중계 아나운서로… 경마장‘女風당당’

입력 | 2005-09-30 03:15:00

국내 첫 여성 경마 중계 아나운서 김수진, 첫 여성 기수 이신영, 유도마 기수 조상은 씨(왼쪽부터). 말과 함께 세상을 바꿔 가는 세 여성이 한자리에 모였다. 변영욱 기자


《경기 과천 경마장(서울경마공원)의 ‘여풍(女風)’이 거세다.

2004년 이신영(25) 씨가 첫 여성 기수로 탄생한 데 이어 지난달 김수진(32) 씨가 최초의 여성 경마 중계 아나운서가 됐다.

국내 경마 80년사에서 ‘금녀(禁女)’의 벽을 잇달아 허물고 있는 것.

여성 관객도 꾸준히 늘어 20%를 웃돌고 있으며 최근에는 이 씨를 모델로 한 국내 첫 경마 영화 ‘각설탕’도 제작되고 있다.

이신영 김수진 씨를 비롯해 주말 경주마를 안내하는 유도마 기수 조상은(25) 씨 등 말과 함께 지내는 세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Q. ‘애마(愛馬)부인’으로 놀림을 당한 적은….

▽이신영=말을 타기 시작하면서 ‘애마부인’으로 숱하게 놀림당했어요. 화를 낸 적도 있지만 말을 좋아하니까 틀린 말이 아니더군요. 정확하게는 ‘애마처녀’죠.

▽조상은=너무 놀려서 고등학교 때 그 영화를 봤어요. 나비 날개같은 잠옷만 펄럭거릴 뿐 하나도 야하지 않았어요.

▽김수진=전 결혼했으니 ‘진짜 애마부인’이네요.

Q. 말로 먹고사는데….

▽김=1996년 마사회에 입사하기 전 손금을 봤는데 ‘말로 먹고 산다’고 하더군요. 신기해요. 지금 말이 뛰는 경주를 보면서 말(중계)로 먹고사니까요.

▽이=운명이죠. 1998년 고교 3학년 때 진학 담당 선생님이 경마의 기수후보생을 제안했어요. 잊어버리고 대학에 진학했는데 과천에서 처음 경마를 본 뒤 곧바로 지원서를 냈습니다.

▽조=중학교 1학년 때 승마를 시작했어요. 유도마 기수가 된 것도 말과 떨어지기 싫기 때문입니다.

Q. 남자보다 말이 좋은지….

▽김=(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고 결혼할 수 없어 직장 동료를 선택했다고 말하곤 합니다. 남편도 저도 경마에 빠져 데이트할 때 그 얘기만 했어요. 그러다 결혼이라는 ‘결승선’을 넘었죠.

▽조=전 아직 말이 좋아요. 남자 친구는 없어도 괜찮은데 말 없이는 못 살겠어요. 세상에 남자는 많지만 비싼 말은 항상 탈 수가 없거든요.

▽이=어려운 질문인데…. 어쨌든 결혼은 기수 생활을 취미로 하라는 남성을 만난 뒤에야 할 작정입니다.(웃음)

Q. 여성이기 때문에 더 힘들었을 것 같다.

▽이=같은 상황에서도 여성 기수는 10배 정도 욕을 더 먹는 것 같아요. ‘말은 좋은데 여자가 타 재수가 없었다’는 식이죠.

▽김=마사회에서 ‘여성 경마 아나운서도 괜찮은가’라는 설문조사까지 했습니다. 제가 남성이었다면 좀 더 빨리 중계석에 앉을 수 있었을 것 같아요.

▽조=중학교 때부터 마방(馬房)에 출입했는데 모든 게 남성 위주죠. 어린 나이에 볼 것, 안 볼 것 다 봤어요. 그 때는 꽤 힘들었어요.

Q. 말이 불쌍할 때는….

▽김=가장 불쌍한 말이 ‘티저(Teaser)’라고 부르는 ‘시정마’예요. 말은 교배할 때 굉장히 위험해요. 자칫하면 수십 억 원 하는 씨수말(種馬)이나 씨암말이 다칠 수 있어요. 시정마는 이 같은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씨암말의 발정을 테스트하거나 달구는 ‘바람잡이 수말’이죠. 시정마의 구애에 암말이 익숙해지면 씨수말이 등장해요.

▽이=목장마다 시정마가 있어요. ‘노고단’이라는 경주마도 시정마가 됐어요. 너무 불쌍해 임신이 안 되는 말과 사랑을 나누게 해 줬다는 말을 들었어요. 욕망을 주체 못한 시정마가 사고(?)를 저지르는 것을 막기 위해 앞치마를 입혀요. 시정마는 스트레스가 심해 수명이 짧은 편이죠.

▽조=안락사 직전 말이 눈물을 흘리는 걸 봤어요.

▽김=뛰다가 피를 뿜으면서 죽는 말도 있어요. 또 몇 주 전 경주하다 다리가 부러진 말이 30m를 절뚝거리며 결승선에 도착한 뒤 쓰러졌어요. 그 말은 출발 지점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버텼어요. 경마를 좋아하면서도 이럴 때는 혼란스러워요.

▽이=1분에서 2분 30초면 경주가 끝나는데 한번 뛰면 10kg씩 체중이 주는 말도 있어요. ‘똑똑한’ 말은 경주 전날 예민해져 설사를 하기도 해요. 사람과 다를 게 없어요.

(경마장에서 잔뼈가 굵은 이들의 표현에는 거침이 없다. 옆에 있는 남성들이 불편할 지경이다. 하지만 이들은 경마장 안팎에서 나누는 일상적인 대화라며 웃었다. 국내에서 가장 비싼 씨수말은 2월 수입된 ‘엑스플로잇’으로 29억 원.)

Q. 어떤 말을 고를까.

▽김=잘 뛰는 말은 목에 기운이 있어요. 귀도 쫑긋 서 있고 눈도 초롱초롱하고 민감하게 반응해요.

▽이=고개가 높지 않으면서도 활기가 넘치는 말이 있어요. 땀도 적당하게 흘리는 말이 좋아요.

▽조=전 뒷다리를 유심히 봐요. 앞다리는 대부분 쭉쭉 뻗는 반면 뒷다리 걸음이 좋지 않은 말도 있거든요.

Q. 잊을 수 없는 말은….

▽이=지난해 41승을 올려 정식 기수가 됐을 때 탄 ‘특별관리’죠. 그러나 ‘중원만리’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파요. 이 말을 타고 두 번 출전해 모두 1등을 했는데 지난해 4월 세 번째 만나 경주하는 도중 말의 다리가 부러졌어요.

▽김=그 사건으로 그 말도 사라졌고, 신영 씨도 힘들어 했죠. 저는 ‘레이저 원’이라는 말이 기억납니다. 지난달 중계 데뷔전에서 ‘레이저 원이 단독 선행으로 다른 말을 따돌리며 결승선을 향해 달린다’는 식으로 멘트를 준비했는데 결과가 딴판이었죠.

▽조=나이가 들어 초보자 강습마가 된 ‘어게인스트’가 기억나요. 예민해서 저만 탈 수 있었어요. 나만 좋아하는데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