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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卷六.동트기 전

입력 | 2005-10-01 03:06:00

그림 박순철


“이 패현 저잣거리의 장돌뱅이 놈이 사람을 너무 작게 보는구나!”

조구가 그렇게 씨근거리며 전서를 사마흔과 동예에게 내보였다. 사마흔과 동예도 그 며칠은 잘 참아냈으나 그때에 이르러서는 더 참지 못했다. 조구가 성을 나가는 것을 말리기는커녕 저희 스스로 그를 따라나섰다.

조구는 함께 성고를 지키던 항양(項襄)을 불러 군사 3000을 남겨 주며 말했다.

“장군은 성안에 남아 뜻밖의 변고에 대처해 주시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패왕의 재보(財寶)와 가솔(家率)을 잘 지켜내야 하오.”

그 말에 항양이 걱정스레 조구를 보며 말렸다.

“대왕께서 떠나시면서 다만 굳게 지키라고만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제껏 잘 참아놓고 어찌 글 몇 줄에 격동되어 큰일을 그르치려 하십니까?”

“패왕께서 말씀하신 보름이 멀지 않았소. 들리기로는 패왕께서 돌아오고 있다고 하니, 지금이 바로 성을 나가 유방을 사로잡을 때요. 패왕께서 유방의 뒤를 끊고 있는 형국이라 우리가 갑자기 치고 나가면 한군은 금세 무너지고 말 것이오.”

“하지만 대사마께서는 이 성고성을 지키기만 하시면 됩니다. 만약 일이 잘못되는 날이면 어찌하시겠습니까?”

지난번 팽성에서 낭패를 당해본 적이 있는 항양이라 그런지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눈치였다. 그런 말로 거듭 조구를 말렸다. 조구가 결기 서린 목소리로 항양의 말을 받았다.

“만약 성고성에 무슨 일이 있다면 이 늙은 목을 바쳐 패왕께 사죄하겠소!”

그리고는 남은 군사를 모조리 긁어모아 3만 대군을 일컬으며 성고성을 나갔다.

성난 조구가 군사를 휘몰아 동쪽으로 달려가니 오래잖아 얼어붙은 사수(5水)가 저만치 보였다. 침착한 부장(部將) 하나가 그대로 군사를 내몰려는 조구를 말리며 말했다.

“강물 동쪽 언덕 위로 살기가 뻗쳐 있고, 얼음의 두께도 기마가 건너기에는 넉넉지 못합니다. 잠시 군사를 멈추고 주변을 살핀 뒤에 사수를 건너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지만 조구는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물 건너는 일을 서둘렀다.

“세상의 평판과 남의 이목을 말하는 자가 비열한 암습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수 동쪽 벌판에서 당당하게 병진을 펼쳐보자 해놓고 딴 짓이야 하겠느냐? 또 말 타고 건널 만큼 얼음이 두껍지 못하다면 먼저 보졸부터 건너가게 하면 된다. 기마대는 말에서 내려 고삐를 잡고 걸어서 보졸을 뒤따르게 하면 전군이 사수를 건너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 먼저 보졸부터 얼어붙은 사수 위로 내몰았다. 동짓달이 가까워서인지 보졸들이 대오를 갖춰 강물 한가운데에 이르러도 얼음은 깨지지 않았다. 그걸 보고 조구는 다시 기마대를 뒤따르게 했다. 말고삐를 잡고 가만 가만 걸어서 뒤따르게 하자 이번에도 얼음은 잘 버텨 주었다.

그렇게 하여 기마대가 사수 한가운데쯤 왔을 때였다. 갑자기 요란한 함성이 일며 동쪽 언덕 뒤에서 몇 갈래의 한나라 기마대가 철갑을 번적이며 나타나 이제 막 사수를 다 건너가는 초나라 보졸들을 덮쳐왔다. 그 뒤를 다시 창칼로 숲을 이룬 한나라 보졸들이 거센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글 이문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