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의 월지에서 출토된 7세기 말 무렵 신라시대 녹유귀면와(국립경주박물관 소장). 그동안 이런 기와의 형상을 도깨비 얼굴이라고 여겨 일본학계에서 붙인 '귀면와(鬼面瓦)'로 불러 왔으나, 최근 들어 용의 얼굴이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어 가고 있다. 사진 제공 강우방 교수
《요즈음 귀면(鬼面)이다, 도깨비다, 치우다, 용이다 하며 여러 설이 나돌아 혼란스러운데 과연 그러한 기와의 정체는 무엇일까. 용의 얼굴이라는 의견은 내가 처음 제기했다. 용의 얼굴을 정면에서 보아 만든 사다리꼴 모양의 용면와(龍面瓦)는 추녀마루 끝에 장식하기 위해 고구려에서 처음 만들었다. 평양 상오리(上五里) 출토 용면와가 그것이다. 고구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연면히 계속된 우리나라에만 있는 독특한 기와이다. 중국엔 전혀 없으며 일본에는 신라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이른바 귀면와(鬼面瓦)들이 있는데 그것은 용이 아니고 말 그대로 귀신의 모습이다. 2002 한일 월드컵을 통하여 크게 떠오른 치우(蚩尤)설은 그가 중국신화에서 천하무적의 동이계(東夷系) 영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 한대(漢代) 화상석에 표현된 치우의 형상과는 거리가 멀다.》
○ 龍의 얼굴 정면모습 압축… 中·日선 발견 안돼
통일신라 초의 용면와는 특히 조형성이 뛰어나다. 1974년에 경북 경주시 월지(月池·안압지) 발굴에서 수습된 녹유귀면와(綠釉鬼面瓦)는 비범한 걸작품이다. 부라리는 눈망울과 주름진 코, 일갈하는 듯 날카로운 어금니가 드러나 있는 입과 널름거리는 혀, 두 뿔과 소용돌이무늬로 된 갈기 등 이 모두가 사다리꼴 추녀마루기와의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다. 부조(浮彫)의 높고 낮음의 정도에 따라 입체감이 달라서 전체가 역동적(力動的)으로 꿈틀거리는 것 같다. 게다가 녹유(綠釉)를 씌웠으니 기와는 더욱 생명의 광채를 눈부시게 발산하고 있다. 아마도 당대의 걸출한 조각가이며 기와를 잘 만들었다는 양지(良志)의 작품일 것이다. 중국에서는 당(唐)대에 이르러 쇠미의 현상을 보일 즈음, 통일신라가 시작되면서 기와 예술이 눈부시게 꽃피우며 최고의 예술품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필경 그 얼굴이 매우 중요하고 존귀한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1997년 여름, 세계에서 가장 힘차고 아름다운 용의 위용에 탄복하며 성덕대왕신종(일명 에밀레종)을 구석구석 살핀 적이 있었다. 그 순간, 용의 모습이 월지에서 출토된 녹유귀면의 모습과 흡사함에 놀랐다. 아, 우리가 지금까지 불러왔던 귀면은 도깨비가 아니고 용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쳐갔다. 용은 길어서 눈이 측면에 있으므로 앞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용 얼굴의 측면을 펼쳐서 한꺼번에 표현해야 한다. 이처럼 긴 용의 얼굴을 정면에서 본 모습을 사다리꼴 모양의 기와의 제한된 공간에 압축하여 생생하게 나타낸 것이 바로 추녀마루기와인 용면와다.
기와 속 용의 입에서 분출되는 영기(기염)의 구도를 분석한 개념도.
용이 용이게끔 되는 여건은 첫째로 입에 물거나 앞발로 받쳐 들거나 이마 위에 둔 여의주가 있어야 되고, 둘째로 입에서 발산되는 구름모양 혹은 덩굴식물무늬의 영기(靈氣) 표현이 있어야 되고, 셋째로 두 뿔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안압지에서 출토된 녹유 용 얼굴은 이 모든 것을 온전히 갖추고 있는 데 반해 일본의 것은 이 여러 여건 가운데 하나도 갖춘 것이 없다. 용면와가 일본으로 전해졌으되 일본인은 잘 이해하지 못하여 여의주와 영기무늬, 두 뿔 등을 모두 빼버려 정체불명의 동물을 만들었기 때문에 훗날 귀면(鬼面)이라 불렸다. 다만 무서운 얼굴의 인상만 같을 뿐이다. 귀면은 일본의 독특한 귀신 개념이요, 도깨비는 한 번도 조형화되어 본 적이 없는 우리 민족설화에만 나오는 여러 모습의 상상적 존재일 뿐이다.
○ 목조건물 火魔 막으려 물 상징하는 용 집어넣어
우리의 용의 얼굴이 바로 만물을 생성시키는 근원자의 모습이기에 신라의 조각가는 온 심혈을 기울여 생명력이 충만한 작품들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러면 왜 용면와를 지붕 곳곳에도 장식했을까. 우리나라의 건물은 예로부터 왕궁이건 사찰이건 모두 대규모 목조였다. 그런데 촛불이나 벼락으로 화재가 발생해 일순간에 타버리는 허망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지붕의 기와 가운데 특히 심혈을 기울여 용면의 추녀마루기와를 만들어 장착했으니, 물을 상징하는 용을 장식함으로써 화마(火魔)를 막으려 했던 것이다. 훈몽자회(訓蒙字會)에 용을 ‘미르’라 했는데 미르는 물이다. 그래서 용의 얼굴은 분노를 띠며 화마를 막음으로써 용은 결국 왕이나 부처를 보호하는 수호신의 성격을 함께 지니게 되는 것이다.
지난 한 세기 동안 막연히 귀면이나 도깨비라고 여겨왔던 것들이 모두 용의 얼굴로 보이는 순간, 이 세상은 나에게 다른 모습으로 보였다. 그때의 기쁨은 말로 형언할 수 없다. 한국문화 전체가 새로이 해석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국립박물관의 설명문에도 귀면와 혹은 도깨비기와는 용면와로 고쳐서 모든 국민이 민족문화를 바로 인식할 수 있도록 올바로 인도해야 할 것이다. 귀면을 연구한 일본학자들이 귀면이 아닌 우리의 용 얼굴을 귀면이라 불렀고 우리가 그것을 그대로 따라왔기 때문에 혼란이 일어난 것이다. 이제 우리 미술사학은 일본 식민지 미술사관을 극복할 때가 되었다.
강우방 이화여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