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지금 기업 수난시대이다. 나라 밖의 고유가나 중국의 팽창 같은 외환(外患)이야 기업이 노력하면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다 해도, 나라 안의 ‘재벌 버릇 고치기’라는 내우(內憂)는 해당 그룹이 웬만큼 상처받는 것만으로 해결될 것 같지 않은 분위기이다. 정치인들끼리의 싸움에야 이골이 나서 관심도 없지만 이번 소란은 국내 최대 기업에 관한 문제로 경제에 미칠 영향이 클 것이라는 점과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공격이 본격화된 것 아니냐는 의구심 때문에 국민의 관심과 근심은 크다. 기업들은 자본주의에 한 맺힌 사람들이 상대 ‘공격 진영’에 많이 있다는 이유로 더욱 긴장하는 모습이다.
요즈음 국제시장에서 기업 간의 경쟁은 또 다른 형태의 국가간 전쟁이다. 그래서 각국 정부는 세계무역기구(WTO)의 규제를 요리조리 피해 가면서 자국 기업을 지원하려고 안달인데 한국에서만은 참으로 별난 모습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지금 아무리 잘 나가는 기업이라도 매순간 전력투구를 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것이 세계 일류기업들 간의 경쟁이다. 소니나 인텔 같은 세계 유수의 기업과 싸우는 데 진력해야 할 삼성의 한 간부가 “사면초가(四面楚歌)가 아니라 삼십육면초가”라며 ‘국내의 적’들에게 포위된 현실을 한탄하고 있어야 하니 답답한 노릇이다. 그 바쁜 시간과 아까운 정력을 이렇게 낭비하고 있는 것이 한국 경제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시중에서는 “대통령 못해 먹겠다는 대통령 때문에 기업 못해 먹겠다”느니, “대통령에게 경제에 관심 가지라고 한 게 잘못이다. 차라리 무관심한 게 경제를 돕는 것이다” 등의 비아냥거림도 들린다. 그러나 이번 문제에 관한 한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은 외견상 (그것이 옳든 그르든) 중립적이어서 그런 비판은 지나칠 수 있다. 단지 노 대통령이 간담회에서 “국민정서에 맞지 않다”고 한 말이 국민의 동의를 받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과거 1970년대 백주 대로에서 경찰이 젊은이들의 장발을 자를 때 처음에는 아무 법적 근거도 없었다. ‘퇴폐적이라 시민에게 불쾌감을 준다’는 ‘대통령의 느낌’이 기준이었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이 나라에서 법보다 ‘국민정서’가 우선한다면 이런 사고방식이야말로 노 대통령이 앞장서서 타파해야 할 개혁 대상이 아닐까.
당시 장발에 불쾌감을 느낀다는 시민은 시중의 일반인들이 아니라 ‘청와대 안의 시민’이었는데 이번 ‘국민정서’ 발언의 국민은 어떤 국민을 말하는 것인가. 우리 사회에서 ‘국민정서’상 더 존경받고 지지율이 높은 사람은 정치인일까 기업인일까. 해외에서 고급 백화점에 진열된 삼성이나 LG의 가전제품들을 보았을 때, 외국 거리를 누비는 국산차들을 만났을 때, 오대양을 누비는 초대형 선박의 절반이 현대중공업 등 국내 조선소에서 건조된 것이란 사실을 알았을 때 자부심을 느끼고 그 기업들을 대견해 하는 정서가 많을까, 아니면 ‘이 사람들 돈을 너무 벌어. 부의 편재가 심해’라며 기업들을 증오하는 정서가 많을까.
중요한 것은 우리를 먹여 살리는 존재가 기업을 손보겠다고 나선 일부 정치인이나 시민단체가 아니라 바로 삼성 LG SK 같은 대기업, 그리고 이들 기업과 협력관계에 있는 무수한 중소업체들이라는 사실이다. 우리 국민 전체 재산의 80% 이상은 소득 상위 20%의 소유이며 빌 게이츠가 가진 재산은 미국인 소득 하위계층 49%의 전체 재산보다 많다. 그러나 가난한 계층이 생긴 것이 한국의 기업이나 미국의 빌 게이츠 탓은 아니다. 기업을 공격한다고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될 수 없는 것은 살찐 사람에게 몰매를 준다고 내 체중이 늘지 않는 것과 같다.
물론 자본주의는 결함이 많은 체제이다. 또 재벌들도 반성하고 고쳐야 할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가진 자가 불안해 하고 시장의 승자가 죄인 취급 받는다면 누가 애써 투자하고 힘들여 돈 벌려 할 것인가. 그 결과는 동반 빈곤일 뿐이다. 정치권의 ‘총구’가 다음에 어느 기업을 겨눌지 모른다는 분위기에서는 이 나라 경제의 미래를 기대하기 어렵다. 정치는 오늘 할 일을 안 하고 지나가도 그만이지만 촌각을 다투는 경제 전쟁에서 기업이 잃어버린 시간은 곧 패배를 의미한다. 달리는 말에 채찍질하는 것은 좋지만 발목만은 잡지 말아야 한다.
이규민 경제大記者 kyum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