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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대한민국/21세기 新고전 50권]여성주의 철학

입력 | 2005-10-05 03:05:00


“여자들이 무슨 철학?” 하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여자들에게 교육 기회를 차단했던 시절에나 걸맞은 사람이다. 많은 여자가 훌륭한 교육을 받고 모든 학문 분야에서 지식 생산자로 활동하면서 자연스럽게 혹은 고통스럽게 여성학, 여성주의 시각을 생성해 내게 되었다. 이들은 모든 분과 학문의 바탕에 깔려 있는 남성 중심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여성 철학자들은 수많은 현인과 철인의 목록에서 ‘왜’ ‘어떻게’ 여성 철학자들이 누락되었는지를 문제시하고, 주류 철학의 고전적 텍스트에서 강고하게 이어져 내려오는 여성 폄훼 주장들을 반박하는 한편, 역사에서 누락된 선배들의 흔적을 찾아내고 발굴하였다.

이렇게 공유된 문제의식으로 당대 여성주의 철학은 철학 안의 성차별 구조에 대한 비판적 작업과 함께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철학함’의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여성주의의 관점으로 철학을 한다는 것은 존재론, 인식론, 가치론 등 제 영역의 문제를 새롭게 규명하고 재구조화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앨리슨 재거와 아이리스 영의 ‘여성주의 철학’은 지구적인 영향력을 지닌 여성주의 철학자들의 집단적 역량과 수준을 보여 준다. 편자들은 철학 논문을 모아서 소개하는 쉬운 편집의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주제별로 선정된 그 분야의 전문가들과 공통의 틀을 갖춘 집필 방식을 공유하는 정성을 들였다. 자신이 담당한 주제 안에서 최근 진행 중인 다양한 논의를 균형 있게 소개하는 식으로 맞춤 집필한 열정과 노력이 책 갈피갈피에서 묻어난다.

이 책의 기본 역할은 여성주의 철학의 길라잡이다.

이 지도를 따라 철학 여행을 하다 보면 문제의 대륙들이 나타나고 최근 여성주의 철학의 쟁점들이 산봉우리처럼 우뚝 서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아시아, 아프리카 등 각 지역에서 전개하고 있는 철학적 논의들을 접하면서 우리 사회의 여성주의를 성찰하는 하나의 창을 확보하게 된다. 예술, 종교뿐만 아니라 윤리학, 정치학, 사회 이론, 자연과학 전반을 여성주의 관점에서 탐구하는 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함께 상상되고 창출됨을 목도한다.

6월에 열린 세계여성학대회에서 만난 아시아권 참가자들은 이 책의 한국어 번역판이 벌써 나와 있음을 부러워했다. 한국 여성철학회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젊은 여성 철학자들이 없었다면 이만한 결실을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여성학 전공자들은 이 번역서를 기본으로 삼아 방대하고 체계적으로 소개되어 있는 인용 서적과 참고 문헌에 도전해 볼 일이다. 성별(젠더), 성(섹슈얼리티), 의미론, 언어와 권력, 행위성, 보살핌 등 여성학의 핵심 개념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성숙시킴으로써 여성주의자로서 철학적 기반을 단단히 다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 아직 깊숙이 깔려 있는 가부장제 문화가 양성 평등의 사회로 변화되기를 소망하는 여성학이 여성주의 철학과 소통하는 것은 서로를 북돋우는 일이다. 실천과 이론이 만나고 서로에게 배움으로써 우리 사회의 변혁이 앞당겨지기를, 그리고 그 폭이 더욱 넓어지고 깊이가 더 철저해지기를 소망한다.

장필화 이화여대 교수 여성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