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보다 ‘나’를 중시했던 X세대가 엄마가 됐다. 이들은 이전 어머니 세대와 달리 가족을 위해 마냥 희생하지 않는다. 사진은 X세대 엄마인 이주희 씨와 딸 홍서영 양. 변영욱 기자
《“별종 인류의 탄생.”
1990년대 초중반 한국에서 ‘X세대’가 화두가 됐다.
1991년 캐나다 작가 더글러스 커플랜드의 소설 ‘제너레이션 X(Generation X)’에서 처음 등장한 말로 한국에서 는 1993년 화장품 광고 카피로 사용되면서 널리 쓰였다.
한국의 X세대는 1970년대 초중반에 태어나 1990년대에 대학을 다닌 이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우리보다 ‘나’만 알며, 풍요 속에서 자라 소비지향적인 세대로 정의됐다.
이후 10여 년이 지나 25∼35세에 이른 X세대는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 X세대 엄마들은 어떤 가치관을 지니고 있을까.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X세대 엄마 5명을 인터뷰했다. 3명은 주부, 2명은 커리어우먼이다.》
● 인생의 중심은 나
X세대는 엄마가 된 뒤에도 개인주의적 특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에게 인생의 중심은 여전히 그 자신이다.
주부 서명진(30·서울 강남구 대치동) 씨는 15개월짜리 아들을 뒀다. 공무원인 남편이 일본으로 파견 발령을 받자 함께 떠나면서 다니던 패션업체를 그만뒀다. 그러나 평생 주부로 살고 싶은 생각은 없다.
서 씨는 아이의 인성 형성에 가장 중요하다는 세 살까지 양육에 집중할 계획. 그 뒤에 일을 다시 시작할 생각이다. 그는 “남편이 아무리 많이 벌더라도 일은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한 아이에게 너무 집착하지 않기 위해 둘째도 낳을 계획이다.
외국계 선박회사인 NSB 비서실에 근무하는 강경아(33) 씨는 27개월짜리 아들을 두고 있다. “아이가 많으면 아이만 바라보며 살 것 같아” 둘째는 낳지 않겠다고 한다.
강 씨는 결혼한 지 5년 됐으나 ‘OO엄마’ 같은 호칭은 어색하다고 한다. “타자에 의해 정의되는 호칭이잖아요. 내 존재는 없고. 특히 아줌마 소리가 싫어요. 여성성을 잃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이 사회에서 내 이름과 위치를 지키고 싶습니다.”
주부들의 경우 직장 여성이 일을 통해 얻는 성취감을 아이를 통해 얻으려는 경향이 있다. 이 때문에 아이 교육에 매우 적극적이다. 서적과 인터넷, 주위 사람들을 통해 정보를 얻고 스스로 아이들을 가르친다. 이처럼 아이에 집중하는 것도 결국은 자신을 위하는 X세대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박정은(31·부산 사하구 다대동) 씨는 남편의 직장을 따라 부산으로 이사오면서 은행에서 퇴직했다. 그는 24개월짜리 딸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 가베(교육용 장난감)를 공부하고 있다. 박 씨는 “지금은 아이 키우는 게 내 일이기 때문에 교육을 직접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한다.
● 앞치마를 두른 공주
X세대 엄마들은 아이들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전(前) 세대와 다르다. 살림과 육아 외에 자기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신라호텔 홍보팀 이주희(31) 주임은 20대 때 패션 디자이너가 꿈이었다. 딸(15개월)이 있는 지금도 변함없다. 패션 잡지를 꾸준히 읽고, 사진 공부도 계속 하고 있다. 해외 패션스쿨로 유학가기 위해 저축도 한다. 그는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지만 전적으로 희생하고 싶지 않다”며 “엄마 세대는 세월이 흐르면 현실과 적절히 타협했지만 내 꿈을 버리지 않겠다”고 말했다. 육아는 시부모의 도움을 받고 있다.
매년 광고회사들이 전국 13∼59세 남녀 5500명을 대상으로 시행하는 소비자 프로파일 리서치(CPR)에서 ‘부모가 아이를 위해 희생하는 게 당연하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응답한 이들도 줄어드는 추세다. 조사에 따르면 1999년 48.1%였으나 2001년 42.1%, 2003년 35.2%였다.
X세대 주부 8명을 심층 인터뷰한 LG애드 ‘2534 주부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이들은 아이들을 하루 5∼6시간 놀이방 또는 어린이방에 보낸다. 이 시간 동안 운동이나 쇼핑을 하거나 학원을 다닌다. 보고서를 작성한 CS팀 정미정(33) 대리는 X세대 주부를 ‘앞치마를 두른 공주’라고 명명했다. 현실적으로 앞치마를 두를 수밖에 없으면서도 마음은 여전히 공주라는 것이다.
● 나를 위해서 쓴다
“백화점에 나가면 남편과 아이 옷만 산다”는 것은 옛말이다. X세대 엄마들은 자신을 위한 소비를 당연하게 여긴다. LG애드 보고서는 “X세대 엄마들에게 쇼핑은 하나의 놀이 활동으로, 스트레스를 받으면 쇼핑으로 시간을 보낸다”고 분석했다.
주부 안혜미(27·경기 의정부시 신곡동) 씨는 아이 옷을 사러 가면 꼭 자신의 옷도 산다. 큰아이(20개월)를 낳은 뒤엔 살을 빼기 위해 한동안 처녀 때 사이즈로 구입했고 그 덕분에 몸매도 추슬렀다.
서명진 씨는 남편의 월급 중 50만 원을 따로 챙겨 자기 옷을 사거나 책을 산다. 그는 아이의 돌을 즈음해 1년간 아이를 키운데 대한 ‘선물’로 페디큐어 10회 티켓을 사고, 수영을 시작했다. 서 씨는 “내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하다.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지만 결과에는 연연하지 않을 것”이라며 “그러면 아이에 의해 내 행복이 좌우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X세대 10년 이후’를 연구하고 있는 제일기획 브랜드마케팅연구소 이세진(33) 박사는 “X세대들은 엄마가 된 뒤 나 중심에서 가족 중심으로 어느 정도 관심이 옮겨간 것으로 보이지만 가족을 위해 마냥 희생하진 않는다”고 말했다.
곽민영 기자 havefu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