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힘찬 레이스를 펼치고 있는 이봉주. 동아일보 자료 사진
황영조(35)는 날렵하다. 초원을 달리는 사슴처럼 경쾌하다. 달리는 자세 어디 하나 군더더기가 없다. 팔의 스윙에도 전혀 힘이 들어 있지 않고 가볍다. 마치 콧노래를 부르며 애인을 만나러 달려가는 것 같다.
‘봉달이’ 이봉주(35)는 투박하다. 힘이 넘치지만 어딘지 거칠다. 지치면 오른쪽 팔이 처지거나 상체와 머리가 뒤로 젖혀진다. 달릴 때 오른발이 팔자걸음처럼 약간 바깥쪽으로 비껴 흐른다. 게다가 오른발을 내디딜 때 발끝이 바깥쪽으로 약간 벌어지기까지 한다. 그만큼 힘이 낭비된다.
황영조는 풀코스 도전 4번 만에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월계관을 썼다. 5000m급 산봉우리를 3번 오른 뒤 곧바로 에베레스트(8850m) 정상을 훌쩍 밟은 셈이다. 황영조는 1996년 풀코스 8번째 완주를 끝으로 마라톤 무대를 떠났다.
이봉주는 풀코스 도전 15번 만에 1996 애틀랜타 올림픽 2위에 올랐다. 그 뒤로도 두 번(2000시드니 24위·2004아테네 14위)이나 더 시도했지만 끝내 올림픽 월계관을 쓰는 데는 실패했다. 아시아경기대회 2연속 우승(1998방콕·2002부산), 2001보스턴마라톤 우승 등 히말라야 8000m급 봉우리는 두루 섭렵했지만 최고봉인 에베레스트 꼭대기만은 밟지 못했다.
이봉주는 너무 많이 뛰었다. 15년 동안 33번 완주(우승 9번, 준우승 6번)는 기네스북에 올라야 할 정도다(황영조는 5년 동안 우승 3번, 준우승 2번). 마라토너가 대회에 한번 출전하려면 최소 매주 330km씩 적어도 12주 동안 훈련해야 한다. 이봉주는 34번(1번 기권) 대회에 출전했으므로 훈련 거리만 13만4640km(3960km×34)에 이른다. 여기에 실제 대회에서 달린 거리(42.195km×33+하프마라톤 및 역전대회) 1619.02km를 더하면 13만6259.02km나 된다. 지구를 약 3.4바퀴(지구 한 바퀴 약 4만 km) 돈 셈이다.
마라톤은 ‘발 발목 정강이 무릎 허벅지 골반’에 고루 충격을 주는 운동이다. 발의 27개 뼈와 골반∼발목에 이르는 5개의 뼈들이 체중의 2, 3배나 되는 하중을 이겨내야 한다. 너무 많이 뛰면 무릎과 발목이 약해진다. 당연히 스피드가 나지 않는다. 세계 유명 선수들이 공식대회에서 15회 정도 완주하고 은퇴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맨발의 영웅’ 에티오피아의 비킬라 아베베도 15번 대회에 출전해 13번 완주했다. 30만 km를 달린 자동차가 5만 km를 달린 자동차에 스피드가 뒤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봉주는 30만 km를 달린 자동차와 같다. 경험은 많지만 스피드가 부족하다. 이봉주가 2위를 차지한 6번 중 4번이 15번째 출전한 1996 애틀랜타 올림픽 이후라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 1996년 이후 4번 우승(후쿠오카마라톤, 방콕아시아경기, 보스턴마라톤, 부산아시아경기)한 기록이 보스턴마라톤(2시간 9분 43초)을 제외하고는 모두 2시간 10분대를 넘은 것도 스피드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지난달 25일 베를린마라톤에서 2시간 12분 19초로 11위를 차지한 것도 그렇다.
이봉주는 기름기가 거의 없다. 마치 ‘뼈에 가죽만 입혀 놓은 것’ 같다. 얼굴은 쪼글쪼글 주름까지 있다. 그가 뛰는 걸 보면 안쓰럽다. 하지만 그는 묵묵히 황영조 이후 10년 동안 한국 마라톤을 짊어지고 왔다. 피와 땀과 눈물로 외길을 걸어왔다. 그는 할 만큼 했다.
“봉달아, 이제 아이들과 손잡고 청계천 산책도 하고, 시민들과 함께 한강 둔치도 달리려무나.”
김화성 스포츠전문기자 mar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