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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1994년 평양 ‘단군릉’ 준공

입력 | 2005-10-11 03:09:00


“평양에 있다는 소위 ‘단군릉’은 황당무계한 전설에 불과하다.”

초기 북한 고대사학계에 큰 영향력을 발휘한 사학자 전주농(全疇農)은 1963년 이렇게 말했다. 북한에서 이같이 명문화(明文化)된 의견은 체제의 공식 견해와 다름없었다.

31년 뒤인 1994년 10월 11일. 평양 근교의 강동군 대박산 기슭에서 ‘단군릉’ 준공식이 열렸다. 22m 높이에 9층 피라미드 형태의 거대한 무덤이었다. 향로, 석등과 신하 8명의 조각상도 세워졌다.

예부터 이곳에는 ‘단군릉’이라고 불려 온 무덤이 있었다. 1530년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둘레 410자나 되는 큰 무덤이 있는데 이를 단군묘라고 한다’고 했다.

1993년, 김일성(金日成) 북한 주석은 갑자기 역사학자들을 만나 단군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단군과 관련한 전설이 많이 전해지고 있는데 역사학계에서 여기에 응당한 주목을 돌려야 합니다.”

이어 유적의 발굴이 이루어졌다. 남녀 한 명씩의 유골과 고구려 양식의 금동왕관 장식, 돌림띠 조각 등이 나왔다. 유골을 전자 공명법으로 연대 측정한 결과 약 5000년 전의 것으로 판명됐다고 북한 측 학자들은 주장했다.

곧바로 단군릉 개건(改建)작업이 시작됐다. 복원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무덤 원형을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고구려 양식의 유물이 발견된 것은 고구려 시대에 이미 한 차례의 개건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학자들은 설명했다.

준공된 뒤 단군릉은 북한이 남쪽의 방문객을 안내하는 필수 코스가 됐다. 개천절인 3일에도 150명의 남한 측 ‘천제(天祭) 봉행단’이 단군릉 앞에서 제사를 올렸다. 그러나 남한을 비롯한 북한 외부의 사학계는 대부분 단군릉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유는 △유골 연대측정에 사용한 방법이 수백만 년 전 유물을 측정하는 데 쓰이는 방법이라는 점 △사료를 근거로 판단할 때 평양이 고조선의 수도가 된 것은 기원전 7세기 이후로 후기에 속한다는 점 등이다.

역사적 진실만큼이나 궁금한 것은 당시 북한이 갑자기 ‘단군’을 강조하고 나선 의도다. 평양 지역을 점유한 북한이 민족의 정통성을 잇고 있다고 강조하려는 것이었을까, 남쪽의 민족종교 세력을 끌어들이려는 의도였을까. 아마 그 모두이겠지만….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