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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卷六.동트기 전

입력 | 2005-10-12 03:08:00

그림 박순철


그날 초나라 군사들은 날이 저물도록 공격을 퍼부었으나 외황성은 여전히 끄덕도 않았다. 날이 저물자 패왕은 징을 쳐 군사를 거두어들이게 했다. 헤아려 보니 앞서의 어느 날보다 많은 군사가 죽거나 다쳐 장졸들의 사기까지 말이 아니었다.

“팽월은 주로 흩어진 위(魏)나라 군사들을 거두어들여 군세(軍勢)를 불렸을 뿐만 아니라 한왕에게 항복하기 전에도 외황을 근거지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 뒤에 다시 한왕이 팽월을 위나라 상국(相國)으로 삼아 양(梁) 땅과 연고가 더욱 두터워지니, 이 땅의 백성들조차 그를 따르는 것 같습니다.”

용저가 성을 떨어뜨리지 못한 것을 변명하듯 그렇게 말했다. 이를 지그시 사리물고 듣던 패왕이 혼잣말처럼 받았다.

“늙은 도적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겁내는 거겠지. 그렇다면 성안 백성들에게 팽월보다 더 무서운 과인이 있음을 알려주어야 겠다.”

그리고는 도필리(刀筆吏)들이 있는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너희들은 오늘밤 안으로 수백 통의 글을 써서 성안으로 쏘아 보내라. 만일 과인에게 항복하지 않고 버티다가 성이 떨어지는 날이면 성 안에서 열다섯 살이 넘는 남자는 아무도 살아날 수 없을 것이라고. 모두 성 밖으로 끌어내 산 채로 땅에 묻을 것이라고. 그리고 또 덧붙여라. 하루를 더 기다려 줄 테니, 성 안 백성들은 힘을 합쳐 팽월의 졸개들을 쫓아내고 성문을 열어 과인에게 목숨을 빌라고.”

그런 패왕의 명에 따라 그날 밤 외황성에는 화살에 매달린 흰 비단천이 눈송이처럼 휘날리며 날아들었다. 이튿날 패왕은 정말로 군사를 내지 않고 하루를 기다렸다. 그러나 성안에서는 여전히 항복하려는 기색이 없었다. 날이 저물자 패왕은 한 번 더 문루 앞으로 나가 성안 군민들을 겁주었다.

“너희들이 아무래도 권하는 술은 마시지 않고 벌주를 받으려고 하는구나. 과인이 마음만 먹으면 이따위 성은 질그릇 부수듯 할 수 있다. 양성(襄城)과 신안(新安)의 일이 남의 얘기가 아닐 것이니라.”

양성과 신안은 모두 패왕 항우가 싸움에 이기고 사로잡은 적병을 모조리 생매장한 곳이다. 특히 신안에서 20만 항졸(降卒)을 산 채로 묻은 일은 울던 아이도 ‘항왕이 온다(項王來)’고 하면 그칠 정도로 천하가 패왕을 두려워하게 만들었다. 패왕은 우레 같은 소리로 그렇게 거듭 성안을 향해 외쳤을 뿐만 아니라, 다음 날 정말로 전군을 들어 마지막 공격을 준비하였다.

초나라 군은 바깥에서 에워싸고 있는 쪽이라 물자가 넉넉한 데다 머릿수도 원래부터 성 안에서 지키는 군민의 몇 배가 되었다. 하루 사이에 구름사다리가 수풀처럼 세워지고, 성문을 부술 충차(衝車)와 쇠뇌를 건 바퀴 달린 누각도 성밖 여기저기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도 외황성은 아무런 흔들림 없이 또 하루를 더 버텨냈다.

“어쩔 수 없다. 내일 새벽 날이 밝는 대로 성을 친다. 이번에는 전군을 몰아 반드시 성을 떨어뜨려야 한다.”

더 참지 못한 패왕이 마침내 그런 명을 내렸다. 그런데 미처 그 밤이 새기 전이었다. 갑자기 외황성의 동문이 열리며 한 갈래의 군사가 치고 나왔다.

글 이문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