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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호칼럼]‘6·25 통일전쟁론’의 아이러니

입력 | 2005-10-13 03:02:00


지난 김대중 정권 당시엔 국가원수가 “신라의 통일과 고려의 통일은 성공했지만 6·25전쟁은 성공하지 못했다”며 ‘6·25가 통일전쟁’이라는 뉘앙스의 발언을 해 논란이 있었다. 노무현 정권 하에선 한국의 언론자유를 정력적으로 내외에 시위하고 있는 한 대학 교수가 ‘6·25 통일전쟁론’의 불씨를 다시 살리고 있다. 그는 당시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한 달 내에 전쟁은 끝났을 테고 인명피해도 1만 명 이하에 불과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심지어 그는 맥아더는 민간인 학살자이며 미국이야말로 주적이라는 극언조차 서슴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수호할 의지가 있는지 한번 떠보려는 것일까? 몇 해 전 그는 김일성 생가를 참배하며 “만경대 정신 이어받아 통일을 이룩하자”는 글을 방명록에 적어 일약 유명해져서 나 같은 사람도 그 이름을 알게 됐다.

그러나 문제는 ‘6·25 통일전쟁론’이 ‘수령님’이나 ‘장군님’의 입맛에 과연 썩 맞을까 하는 점이다. 통일전쟁론은 남한 지식인 사회를 어지럽히는 효과가 있다. 또한 통일전쟁론은 북의 관점에선 과거사의 치명적 약점인 민족상잔의 남침전쟁을 정당화해 주는 명분으로 제법 쓸모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실속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6·25 통일전쟁론’은 북의 시각에선 수용할 수 없는 것이요, 그래서 자칫 “남반부 얼간이들의 잠꼬대”라고 얻어맞지나 않을지….

6·25 기습 남침 직전까지 북은 오직 평화통일만을 선전해 오고 있었다. “통일을 위해 전쟁을 해? 그것은 탱크 한 대 없이 밤낮 북진통일을 떠벌리고 있던 남의 이승만 도당이나 꾀하는 수작이다. 6·25는 남측 괴뢰군의 북침으로 일어난 전쟁이고 북은 38선 전역에 걸친 남의 기습공격을 격퇴하고 반격을 가했다”는 것이 북의 공식적인 주장이다.

북한만이 아니다. 소련을 비롯한 모든 공산권의 당시 공식 주장도 그랬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제2차 세계대전 후 어디에서 전쟁이 난다면 그것은 반드시 미 제국주의자와 그의 주구(走狗)에 의해서 시작된다는 것이 전후 공산주의 선전의 핵심적인 교리였다. 그 배경에는 냉전이 뚜렷하게 가시화된 1947년, 트루먼 독트린에 맞서 그해 가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린 코민포름(국제공산주의 정보기구) 창립대회에서 소련의 주다노프 서기가 발표한 ‘두 진영론’이 깔려 있다. 2차대전 후의 세계는 미국이 주도하는 반(反)민주주의-제국주의 진영과 소련을 선두로 하는 반제국주의-민주주의 진영으로 양분되었고, 미국을 맹주로 하는 제국주의 진영은 새로운 전쟁을 도발하여 세계 지배를 획책하고 있는 반면 소련을 선두로 하는 민주주의 진영은 거기에 저항하여 평화를 수호하려 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 타협할 수 없는 대립을 하고 있다는 것이 ‘두 진영론’의 골자이다.

‘평화’는 사회주의 진영의 독점물이요, 만일 세계의 어느 곳에서 전쟁이 난다면 그건 반드시 미국이나 그에 추종하는 진영에서 도발한 결과라는 소련의 평화공세는 장 폴 사르트르나 모리스 메를로퐁티 같은 서유럽의 지식인에게까지 깊숙이 파고들어갔다. 5000만 명(!) 안팎의 인명을 앗아간 2차대전을 치르고 난 전후의 세계인에게 평화처럼 소중한 것은 없었다. 나치 전범을 심판한 뉘른베르크 재판에서도 “전쟁은 그 본질에 있어 악(惡)”이라고 정언적으로 단죄하고 있었다. 어떤 명분, 어떤 목적을 위한 전쟁이든….

그러한 전쟁을 막고 평화를 지키는 것이야말로 북한을 포함한 공산권의 대의(大義)였다. 6·25가 통일전쟁이었다? 사회주의 북한이 통일을 위해 남한을 침공하는 전쟁을 했다? 그건 사르트르나 메를로퐁티 같은 좌파 지식인의 눈에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들은 그 때문에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전쟁은 오직 미제와 그 주구만이 도발한다는, 그때까지 믿었던 세계관이 박살나 버렸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는 오랜 침묵에 빠졌고 메를로퐁티는 뉴욕에서 엘리베이터 보이로 취직이나 해볼까 하는 ‘다른 방식에 의한 자살’까지 생각했다던가. 공산 진영을 위해선 그렇기에 ‘남한의 북침’이 절대로 필요했던 것이다.

통일전쟁론에 대해 평양의 권부는 어떤 반응을 할까. “통일전쟁이라니? 그런 말 하는 애도 박헌영 이승엽 임화 따위와 한통속으로 미제의 간첩 아이가?”

최정호 객원大記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