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인은 지난날 양성(襄城)에서도 3만을 묻은 적이 있고 신안(新安)에서도 20만을 묻었다. 모두 과인에게 빨리 항복하지 않고 끝내 맞서다가 그리되었으니, 그게 과인을 거스르는 자들을 다스리는 법이다. 이제 와서 무엇 때문에 그 법을 바꾼단 말이냐?”
패왕 항우가 자신도 모르게 풀리는 목소리를 짐짓 다잡으며 거칠게 되물었다. 소년이 어린 나이답지 않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렇다면 저도 저리로 보내 아버지와 함께 묻어 주십시오. 대왕을 기다려 새로운 세상을 기약할 수 없다면 차라리 그렇게라도 일찍 죽는 게 나을 것입니다.”
그리고 선 채로 가만히 눈을 감는 품이 마치 한세상을 다 산 늙은이 같았다. 전란의 시대가 길러 낸 그 애절한 조숙에 감동한 것일까, 순간 패왕의 바위 같은 심사가 슬며시 움직였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아직도 엄격하기 짝이 없었다.
“좋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한번 믿어보겠다. 그러나 아직 모두 용서한 것은 아니다. 만약 수양(휴陽)에 이르기까지 단 하나의 성이라도 다시 과인에게 맞서는 성이 있으면, 반드시 돌아와 너희들까지 산 채 땅에 묻겠다!”
그러면서 땅에 묻으려던 외황의 남자들을 모두 놓아 보내게 하였다.
다음 날 패왕은 다시 동쪽으로 군사를 냈다. 그 사이 소문이 퍼졌는지 첫날 저녁나절 초나라 군사들이 이른 성은 한 번 싸워 보지도 않고 성문을 열어 패왕에게 항복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다시 사흘, 패왕이 동쪽 수양성에 이를 때까지도 항복하지 않고 뻗대는 성은 하나도 없었다.
수양성까지 싸움 없이 항복해 오자 패왕은 한편으로는 놀라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허망한 기분까지 들었다. 팽월이 전에도 오래 머물렀을 뿐만 아니라 이번에도 그리로 달아났을지 모른다는 말을 들은 터라, 수양성이 싸움 없이 항복해 온 것이 패왕에게 더욱 기이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싸우는 자가 이제 싸워 이기려는 적에게 너그러워야 한다니 이 무슨 괴상한 이치냐. 많이 죽여야 자랑이 되는 게 싸움이 아니냐. 거기다가 알 수 없는 일은 더 있다. 싸울 채비를 하고 기다리다가 싸워 보지도 않고 항복하다니, 그것은 또 얼마나 어이없는 노릇이냐. 적의 투지를 녹일 너그러움이 정말로 있다는 것이냐, 아니면 비겁한 적의 두려움이 구실을 얻은 것뿐이냐.)
패왕처럼 타고난 전사(戰士)로서는 아무래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다가 옛날 숙부 항량에게 병법을 배울 때 흘려들은 구절을 퍼뜩 떠올리고 중얼거렸다.
(이게 바로 싸우지 않고 이긴다는 것인가. 병가(兵家)들이 걸핏하면 우겨대듯, 이렇게 이기는 것이 가장 잘 이기는 것이라면, 군사를 부려 싸운다는 게 얼마나 까다롭고 성가신 일이 되겠는가. 앞으로 나를 기다리는 싸움이 이런 것이라면 참으로 암담하구나.)
어쩌면 그때 패왕은 중요한 깨달음을 얻은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깨달음은 너무 늦었고, 그가 빠져 있는 처지도 그 깨달음을 실전에 적용할 수 있는 여유를 주지 않았다. 오래잖아 날아든 놀라운 소식이 모처럼 가라앉고 있던 패왕의 심기를 바닥부터 휘저어 놓았다.
“성고성이 한왕 유방의 손에 떨어졌다고 합니다.”
글 이문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