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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우 칼럼]당신들만의 ‘연석회의’

입력 | 2005-10-15 03:04:00


노무현 대통령은 올해 첫날 “새해에는 사회적으로 큰 갈등이나 싸울 일은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경제 살리기에 매진해 일자리를 많이 만들고 대기업과 중소기업, 첨단산업과 전통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수도권과 지방, 부유층과 서민층의 양극화를 해소해 나가는 데 역점을 두겠다는 ‘경제 올인(다걸기)’ 선언이었다.

1월 6일 종교계와 학계, 법조계와 재계, 문화예술계와 시민사회의 보혁(保革) 인사 169명이 ‘2005 희망제안’을 발표했다. 이날 자리는 한국사회의 합리적 보수와 진보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인사들이 한목소리를 냈다는 점만으로도 주목을 끌었다. ‘희망제안’은 사람 중심의 경제사회 발전과 일자리 창출, 양극화 해소를 위한 사회협약의 필요성을 호소했다. 노 대통령이 사흘 전 이해찬 국무총리가 대독한 국회 시정연설에서 제의한 ‘국민대통합 연석회의’와 같은 맥락이다.

그렇다면 노 대통령은 연초에 사회협약을 ‘내셔널 어젠다(국가 의제)’로 내놓았어야 했다. 보수 진보 진영의 인사들이 모처럼 함께 모여 미래의 비전을 제시했을 때 그것을 담아 낼 수 있는 큰 그릇을 만들고 정치권과 국민의 협조를 당부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필자와 만난 ‘희망포럼’의 한 관계자는 “정부는 방어적이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데 왜 민간이 나서느냐며 못마땅해 하는 기색이었다. 대통령의 생각이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386그룹 참모들은 ‘희망제안’에 참여한 원로급 보수인사들에 대해 거부감도 갖고 있지 않았나 싶다”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희망제안’이 결실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은 뻔한 노릇이다.

4월 재·보궐선거에서 여당이 참패하자 대통령의 중심의제는 곧바로 정치로 넘어갔다. ‘연정(聯政) 드라이브’가 시작됐다. ‘권력을 통째로 내주겠다는데 왜 안 받느냐’는 억지와 지역구도 극복에서 선거구제 개편으로 오락가락하는 혼란 속에서 대통령이 연초에 다짐했던 ‘경제 살리기’는 순식간에 국가 중심의제에서 밀려났다.

‘연정 기획’은 실패했다. 그 뒤에 나온 것이 ‘국민대통합 연석회의’다. 그러니 ‘변형된 연정론’의 의심을 받는 것이다. 연석회의가 ‘총리의 어젠다’라고 하는 것부터 군색하다. 민간 쪽에서 제안할 때는 시큰둥하더니 정부 주도로 사회협약을 만들어 내겠다는 것인데 실현 가능성이 얼마나 될지도 의문이다.

‘희망포럼’ 관계자는 “총리 소속의 국정협의기구에 보혁을 망라한 민간 인사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겠는가. 도리어 어렵게 엮어낸 민간 쪽 활동마저 위축시키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현실적으로도 어렵다. 사회협약의 주요 당사자인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은 노동부 장관 해임을 요구하며 노사정위원회 참여를 보이콧하고 있다. 양대 노총 모두 내부 부패와 주도권 다툼으로 사실상 노동계의 대표성을 상실한 지경이다.

어떤 협약을 이뤄 내든 그것을 추진하고 집행하려면 예산이 뒷받침돼야 하고 그러려면 국회에서 야당의 협조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야당의 반응은 부정적이다. 따라서 ‘국민대통합 연석회의’는 그렇지 않아도 난립한 온갖 위원회의 수만 하나 더 늘릴 소지가 크다.

네덜란드의 노사정(勞使政) 협약인 ‘바세나르 협약’을 이뤄 냈던 빔 코크 전 총리는 “사회적 대화를 성공시키기 위한 중요한 요소는 상호 간 신뢰와 자신감, 인내, 그리고 무엇보다도 장기적인 국가 이익에 집중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노 정부는 우선 신뢰를 잃었다. ‘연석회의’가 결국 코드 맞는 사람들을 모아 여소야대 국회를 무력화하려는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의 발로가 아니겠느냐는 비난이 나오는 것도 그간의 의제설정에서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다.

하물며 ‘장기적인 국가 이익’은 지금 혼돈과 위기에 직면해 있다. 국가 정체성과 국기(國基)가 흔들리는 풍토에서 어떻게 장기적 국가 이익을 생각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 사회협약을 이뤄 낼 수 있겠는가. 이런 식의 엇박자로는 사회 주체 간 자발적 동의를 구할 수 없다. 자발적 동의 없는 사회협약은 오히려 갈등만 증폭시킬 수 있다. 이런 전망이 틀리지 않다면 ‘연석회의’는 미리 접는 게 낫다.

전진우 논설위원 youngj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