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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민 칼럼]왼쪽으로만 도는 우리사회 운전대

입력 | 2005-10-18 03:08:00


영어에 ‘백 시트 드라이버(back seat driver)’라는 말이 있다. ‘뒷자리에 앉아 운전을 지시하는 사람’, ‘지위가 낮으면서 지배하는 실세’ 혹은 ‘주제넘게 간섭하는 사람’을 뜻한다. 요즘 한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면 이 말이 딱 떠오른다.

북한이 휴전선 너머 남쪽에 대고 이리 가라, 저리 가라 ‘지시’해 온 것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 북한은 슬슬 남쪽 차의 뒷좌석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남북정상회담 후 불과 5개월 만에 북한은 당시 대한적십자사 장충식 총재가 한 월간지와의 회견에서 “(북한이) 우리보다 자유가 없고 통제사회 속에서 살아왔다”고 한 (바른)말을 트집 잡아 그의 교체를 촉구했다. 정부는 한 달을 버티다가 결국 그럴듯한 명분을 달아 그를 물러나게 함으로써 북한을 ‘뒷좌석’에 모시기 시작했다.

다음 해 6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홍순영 통일부 장관이 주적론 유지의 불가피성을 설명하다가 북측의 반발을 샀던 사건은 더 심각한 사례다. DJ 정부는 또다시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홍 장관을 해임함으로써 내각의 인사권까지 북한에 건네줬다는 비판을 받았다. 남한이 주권국가인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할 이런 사건들이 계속되면서 북한은 더욱 적극적으로 ‘백 시트 드라이버’ 행세를 하게 됐다.

북한의 참견은 민간 기업의 인사 문제에까지 이어졌다. 북한은 현대와 ‘대북 7대 사업’의 독점사업자 계약을 하고도 현대아산의 김윤규 부회장 인사를 빌미로 이 기업을 배척함으로써 또 한번 스스로를 못 믿을 집단으로 격하시켰다. 이들에게 계약은 형식이고 국제 상거래 규범은 그냥 참고사항일 뿐이다. 더 기막힌 것은 그 과정에서 공격받고 있는 현대아산을 현 정부가 압박하고 나선 모습이다. 북한의 주문, 혹은 눈치 보기 때문은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결과적으로 이번 일에서도 우리는 앞좌석 운전사, 북한은 뒷좌석 지시자가 된 모습이다.

만일 북한이 아닌 미국이나 일본이 우리한테 이런 짓들을 했다면 현 정권과 친북세력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정부와 친여 언론들은 국민감정을 격동시켜 온 나라를 또다시 반미 반일의 촛불동산으로 만들지는 않았을까.

기이한 것은 뒷좌석 손님이 운전사에게 사례비를 내는 게 아니라 거꾸로 운전사가 뒷좌석으로 뭔가를 자꾸 준다는 것이다. 남북한 관계에서는 늘 주는 쪽인 남한이 을(乙)처럼 안달이고 받는 쪽인 북한이 갑(甲)처럼 거만하게 행동해 왔다. 2000년 6월 DJ 방북 때는 평양의 도로 포장용 아스팔트와 건물 치장용 페인트까지 몽땅 우리가 부담할 정도였지만 북한은 약속한 ‘잔금’을 내라며 마지막 순간에 정상회담 일정을 미뤄 끝내 5억 달러를 채워 받았다. TV 방송사들은 평양 공연 한 번에 수백만 달러씩 건네줬고 정부는 ‘인도적 차원에서’ 장관급회담에 비료 몇 십만 t, 이산가족 상봉에 식량 몇 십만 t씩을 쥐여주었다. 현 정부는 북한 핵 회담에서 ‘백 시트 드라이버’를 달래기 위해 또다시 수천억 원대의 식량과 수조 원대의 전력 제공을 약속한 상태다. 성과가 얼마나 나올지 모르지만 하도 많은 탐욕의 짐을 실었기 때문에 이 차는 아주 나쁜 연비로 달리고 있을 뿐이다.

남을 도울 때 돕는 사람이 거만하면 주고도 욕먹을 수 있다. 반대로 받는 자가 무슨 진상이라도 받듯 너무 무례해도 주는 쪽은 자존심 상하게 마련이다. 지금 대다수 남쪽 시민의 심정이 어떠한지를 우리 정부도 잘 살펴야 하며 북한도 남에서는 여론이란 게 얼마나 중요하고 무서운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이런 판국에 ‘만경대 정신’이 충만한 어느 대학교수가 드디어 (적화)통일 위업을 이루기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말은 분별 있는 많은 이들을 으스스하게 만들었는데 여기에 집권자 측이 법무부 장관을 통해 노골적으로 그를 역성들고 나서서 우리를 또 놀라게 했다. 그 교수는 드디어 용감하게 가면을 벗었고 현 정권은 이제 본색을 드러내는 모험을 감행한 것인가. 북한은 이 시간에도 뒷좌석에서 계속 ‘좌회전’ 사인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운전대는 자꾸자꾸 왼쪽으로만 돌아가는 형상이다. 이 위험한 운전이 언제 어떻게 끝날지, 세상이 점점 피곤하고 불안해지고 있다.

이규민 경제大記者 kyum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