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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혼란’ 한국號 어디로 가나]김용준 고대 명예교수

입력 | 2005-10-18 03:08:00

김용준 교수는 “권력을 쥔 쪽에서 감정을 버려야 할 터인데 지금까지도 자꾸만 감정을 앞세우고 있다”고 안타까워하면서도 “그러나 우리 국민의 저력을 믿는 만큼 비관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강병기 기자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동국대 강정구(姜禎求) 교수 발언 사건에 여권 핵심부가 개입하면서 정치 논란과 이념적 혼란이 가중되자 원로학자들이 잇따라 입을 열기 시작했다. 독재정권 시절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두 차례나 해직되는 아픔을 겪었던 김용준(金容駿·78) 고려대 명예교수가 17일 본보의 인터뷰 요청에 응했다. 김 교수는 기독교 사상가이자 민권운동가였던 고 함석헌(咸錫憲) 선생의 애제자로 그가 창간한 ‘씨ㅱ의 소리’를 이어받아 1991년까지 발행인을 맡았으며 1970, 80년대 진보적 인사들과 목소리를 같이했던 지식인이다. 그러나 계간 ‘철학과 현실’의 올해 가을호에 실린 ‘나의 젊은 시절’이란 체험담을 통해 여권과 진보세력이 주도하고 있는 과거사 청산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김 교수는 자신이 이사장으로 있는 서울 중구 남대문로 한국학술협의회 사무실에서 밝은 표정으로 기자를 맞았다. 김 교수는 내년 2월 출간을 목표로 함석헌 선생에 관한 회고록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김 교수는 “1949년 서울대 공대를 다닐 때 우연히 함 선생의 강연을 듣고 반해 40년을 쫓아다녔다”고 말했다. 그는 “내 전공이 유기화학인데 나는 유기화학만 빼고 모두 다 함 선생한테 배웠다”며 웃었다. 그에게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직접 체험한 사람으로서 강정구 교수의 역사관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런 건 우리 같은 사람한테는 들을 가치도 없다. 귓전에도 오지 않는다. 정신이 나간 소리일 뿐이다. 나도 광복 후 한동안 사회주의에 심취한 적이 있지만 사회주의가 그렇게 좋다면 왜 이북에서 그렇게 피란민이 많이 내려왔겠나. 살기 좋은 나라면 올라가야지 왜 다들 내려왔단 말인가.”

김 교수는 현재의 혼란상황은 여야가 모두 이성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비판하면서도 여권의 책임이 더 크다고 진단했다.


“현 정부를 보는 내 눈은 이렇다. 전 정권들이 오죽 정치를 잘못했으면 이 정권이 들어섰겠느냐는 거다. 현 정부를 비판하기에 앞서 전 정권들을 나무라고 싶은 마음이다. 옛날 군사정권 때 소외받고 고통받았던 사람들의 고생과 원한을 충분히 이해한다. 나도 겪었으니까. 그러나 DJ 정부에 이어 연거푸 정권을 잡지 않았느냐. 그러면 칼자루를 쥔 쪽에서 감정을 버려야 할 터인데 지금까지도 자꾸만 감정을 앞세우고 있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에게 충고할 기회가 있으면 이런 말을 꼭 해주고 싶다. ‘당신은 대통령입니다. 대통령은 옛날 상감과 같은 존재이고 그러면 전 국민이 아들이고 딸 아닙니까. 국민 모두를 다 안아 줘야지 아직까지 감정에 사로잡혀 있어야 하겠습니까.’”

그는 대통령뿐만 아니라 소위 진보적이라는 인사들이 아직도 정치적 약자처럼 행동하는 것에 대해서도 거침없는 비판을 쏟아냈다.

“얼마 전 한 우익단체가 원로 1500여 명의 서명을 받아 시국성명을 발표하니까 진보진영 쪽에서 100명을 모아 성명을 발표한다며 내 이름을 넣겠다고 연락이 왔다. 연락해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지만 ‘왜 이런 짓을 해야 하느냐’고 말했다. 저쪽이야 달리 의사를 표시할 방법이 없으니까 그러는 것 아니냐. 대통령이 당신들 편인데 왜 나 같은 사람까지 집어넣어서 대항해야 하느냐고 말이다.”

그는 진보적 지식인들의 이중적 행태에 대해서도 매섭게 비판했다.

“해직됐을 때부터 나는 항상 똑같은 잣대로 남북을 재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를 내쫓은 정권을 재는 잣대를 가지고 김일성(金日成)도 재고 이북도 재야지 이 상황엔 이 잣대, 저 상황엔 저 잣대를 대서는 안 된다. 박정희(朴正熙) 독재보다 김일성 독재가 몇 배 더 심했던 것이 사실 아니냐. 강정구 교수를 만난 적도 없지만 평소 언행과 가족들의 현재 생활에 괴리가 있어 더 비판받는 것 아니냐. 이중적인 일은 안 하면 좋겠다.”

▼과거사 청산은 대한민국 정통성 부정 백번 잘못된 일▼

현 집권층의 주류세력 교체 추진이 대한민국 수립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움직임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지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대한민국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은 백번 잘못된 것이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것이다. 대한민국 수립이 잘못됐다고 하자. So What?(그래서 어쩌자는 것인가) 역사는 고쳐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대로 정당하게 평가하면서 앞으로 나가야 한다. 친일 청산도 광복 직후에 했어야지. 일본 육군 대위 출신이 대통령이 됐지만 나라가 여기까지 진전돼 온 마당에 어쩌자는 것인가. 임진왜란 때 누가 어떻게 했는지 가려서 어쩌자는 거냐. 요즘 젊은 세대들은 6·25전쟁이나 임진왜란이나 모두 먼 옛날 일로 인식한다.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내 둘째 아들도 6·25전쟁의 실상을 제대로 모른다. 학문적으로야 과거사를 정리해가야겠지만 현실정치와 연결시켜 친일 청산을 주장해서 무슨 득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는 유신시절 반체제 인사였던 자신의 절절한 경험을 통해 ‘증오의 역사관’을 극복하고 통합으로 나갈것을 제안했다.

“육영수(陸英修) 여사가 죽던 날 나는 일본 교토(京都)에서 일본 교수들과 세미나를 하고 있었다. 점심시간에 TV를 보다가 이를 알았는데 일본에도 내가 반체제 인사로 알려져 있어서인지 앞에 앉은 일본 교수가 통쾌하다는 식으로 얘기하더라. 내가 정색을 하고 얘기했다. ‘나도 박 정권을 좋아하지 않지만 우리나라의 대통령은 박정희이고 죽은 사람은 우리나라의 퍼스트레이디다. 사적인 감정을 떠나 나라의 상징적 대표가 죽었는데 한국 사람인 나를 앉혀놓고 그런 얘기하면 어떻게 대해야 하느냐.’ 그 교수가 무릎을 꿇고 사죄를 했다. 나라가 오죽하면 이런 꼴을 당하는지 생각하니 울음이 나왔다.”

그는 그러면서 노 대통령한테도 똑같은 말을 하고 싶다고 했다.

“누가 뭐라 해도 우리나라의 대통령은 노 대통령이다. 대통령이면 모든 국민을 안고 가야 하는데 왜 그렇게 서울대와 강남 사람을 미워하느냐. 분명 무슨 큰 편견이 작용하고 있다. 2년 반이 지나 집권 후반기가 됐으면 그런 콤플렉스를 벗어던져야 하는데 아직도 그러지 못한 것 같다. 그게 우리나라의 비극이다.”

노 대통령과 정권 핵심인사들이 ‘코드’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바람에 분열이 싹 트는 것 아닌가.

“이 정권과 코드가 맞는다는 지식인들과 옛날 다 가깝게 지냈지만 그들의 요즘 행태를 보면 비판할 게 너무 많다. 내 눈으로 볼 때 ‘아, 저 사람이 어떻게 저런 얘길 하지’ 하는 게 수없이 있다. 구체적으로 사례를 든다면 얼마든지 들 수 있지만 언급하고 싶지 않다. 코드 안 맞는 사람들을 써야 정치가 되는 것이다. 그래야 나라를 올바로 다스릴 수 있다.”

김 교수는 그러나 길게 봤을 때 우리 국민의 저력을 믿는다며 낙관론을 폈다.

“(강정구 사건과 관련한) 김종빈(金鍾彬) 검찰총장의 당당한 행동을 보고 희망을 갖게 됐다. 흔들림 없이 할 일 다 하고 깨끗이 정리한 뒤 사표 내는 걸 보고 우리나라가 아직 살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대통령은 섭섭하셨던 모양이지만 나라 전체 수준이 그만큼 돼 있는 거다. 서울대 정운찬(鄭雲燦) 총장이 대학 자율을 위해 정부와 싸우며 버티는 모습도 좋지 않은가.”

▼“인천상륙 소식에 이젠 살았다며 눈물”▼

김용준 교수는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의 체험담을 자세하게 설명하면서 최근 과거사 청산의 논리나 미국의 6·25전쟁 참전에 관한 일부 급진세력의 주장을 비판했다.

그는 “몇 년 전 북한 응원단 여성들이 김정일(金正日) 사진이 비에 젖었다고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많은 남한 사람들이 경악했다”면서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내게는 그게 바로 천황 폐하의 적자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내 어릴 때 모습이었다”고 고백했다. 따라서 일제강점기 국내에서 이런저런 민족운동을 한 사람들을 이제 와서 함부로 친일파라고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게 김 교수의 주장이다.

“함석헌 선생의 스승인 유영모(柳永模) 선생을 통해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 선생에 대해 알게 됐다. 유 선생은 사람에 대한 평가가 엄격하기로 유명했다. 관악산 등산을 함께 하면서 황국신민으로 크던 나를 한국인으로 바꿔준 춘원 이광수(春園 李光洙)에 대해 말씀 좀 해달라고 했더니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글재주가 좀 있습죠’라고 딱 한마디만 했다. 그처럼 칭찬에 인색한 분께서 인촌에 대해서 2시간에 걸쳐 쉬지 않고 칭찬하는 것을 보고 정말 깜짝 놀랐다.”

김 교수는 “나는 광복 직후 경성제대와 전문학교 몇 군데를 통합하는 국대안(國大案) 파동 때 좌익투쟁위원을 맡았다가 사회주의에 환멸을 느껴 탈퇴했다. 그래서 6·25전쟁이 난 뒤 숨어 지냈다. 8월 초 서울을 빠져나가 고향인 충남 천안에 가있었는데 인천상륙 소식을 듣고 모였던 사람들이 ‘이젠 살았다’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전쟁 중 미군부대 통역관으로 압록강까지 북진했었다는 김 교수는 “인천상륙작전이 없었다면 지금의 한국은 없다는 것을 왜 모른단 말인가”라고 안타까워했다.

정리=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