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놀이의 대가 김덕수(아래 사진) 씨가 장구가락을 뽑아내기 시작하자 부인 김리혜 씨는 어느새 살풀이춤을 추기 시작했다. 권주훈 기자
잘게 부서지는 장구 소리…. 끊어질 듯 이어지는 하얀 춤사위. 부부는 눈빛으로 미세한 호흡을 주고받으며 흐드러지는 장단의 곡예를 탄다.
17일 오후 서울 중구 흥인동 충무아트홀 지하 연습실에서 만난 한국무용가 김리혜(52) 씨는 복 받은 춤꾼이다. 한국 최고의 ‘장구 명인’ 김덕수(52) 씨가 남편인 덕에 연습실에서도 CD 반주가 아닌 펄펄 살아 뛰는 가락에 맞춰 춤을 춘다.
“덕수 씨는 예술의 정수인 장단을 치는 사람인 만큼, 제가 안 가 본 길을 가게 해 줄 것 같았어요. 처음엔 1년만 한국 춤을 배우고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한의 춤사위로 풀어낸 韓日의 차이
재일교포로 태어나 일본에서 잡지사 기자를 하던 김리혜 씨는 1981년 한국으로 왔다. 도쿄에서 우연히 본 한국 춤에 매료돼 “더 이상 일본에서 살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한국에서 김덕수 씨에게 장구 가락을 배우는 한편 이매방 선생 문하에 들어간 이듬해, 동갑내기 스승이던 김덕수 씨와 결혼했다. 이후 1994년 해외교포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중요무형문화재 제97호 ‘살풀이춤’ 이수자로 선정됐고, 1998년에는 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의 이수자가 됐다.
20여 년간 남편의 사물놀이 공연에서 잠깐씩 ‘승무’나 ‘살풀이’를 춰왔던 김리혜 씨는 최근에야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춤판을 벌이기 시작했다. 특히 다음 달 3∼5일 오후 7시 반 서울 호암아트홀 무대에 올리는 ‘하얀 도성사’는 일본에서 나고 자라 한국무용가가 된 김리혜 씨만이 표현할 수 있는 독특한 춤사위를 보여 준다. 그의 독무이지만 음악은 남편과 일본 전통 타악 연주자 센바 기요히코 씨가 함께 만들었다.
“센바 씨가 한국 예술에 담긴 ‘한(恨)’의 정서가 무엇이냐고 묻더군요. ‘한’이란 글자는 일본에서는 ‘원한, 원망’이라는 의미가 크지만, 한국에서는 단순한 원한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의 슬픔, 간절함, 애절함 등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해 줬어요. 그랬더니 ‘아! 그렇다면 도성사를 공연해 보자’고 제안했어요.”
‘도성사’는 일본 고서기(古書記)에 나오는 설화로 ‘노(能)’ ‘가부키(歌舞伎)’로 자주 공연되던 소재. 자신을 버리고 떠난 남자를 그리워하던 여인이 뱀으로 변해 복수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김리혜 씨는 이 설화를 한국적으로 해석해 한을 풀어 주고 화해와 상생으로 이끄는 춤을 춘다.
○한국 장단과 일본 노의 결합
‘하얀 도성사’에서는 김리혜 씨의 춤 외에도 남편이 이끄는 한국팀(6명), 센바 씨가 이끄는 일본팀(7명)이 만들어 내는 양국 전통음악의 어울림이 백미다. 대금과 아쟁으로 연주되는 시나위 반주, 동해안 오구굿 음악, 승무의 북 가락, 경기도당굿 등 한국의 화려한 장단과 일본 노 음악의 자로 잰 듯한 형식미를 결합하는 실험적 시도다.
“일본 음악에는 장단 개념이 없습니다. 반면 우리는 전 세계에서도 전무후무한 36박, 42박의 화려한 장단이 있지요. 센바 씨하고는 25년간 함께 작업해 왔습니다만, 늘 서로 기운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어요. 이번 작품에서는 서로의 합의 하에 맞지 않는 미세한 부분은 서로 양보하며 상생을 추구했습니다.”(김덕수 씨)
“일본 춤은 마치 사진을 찍듯이 장단을 잠깐씩 멈추고 관객들에게 보여 주는 형식미를 추구하지만 한국 춤의 장단은 끊이지 않고 흐르며 속에 있는 것을 풀어내지요. 일본 춤은 직선으로 호흡을 내뱉는 데 비해 한국 춤은 곡선처럼 호흡을 감아 도는 게 특징입니다.” (김리혜 씨)
한일수교 40주년 기념공연인 ‘하얀 도성사’는 다음 달 일본 도쿄의 신국립극장을 비롯해 오사카, 나고야, 기타큐슈 등에서도 공연된다. 02-2232-7952
○ ‘장구 명인’ 김덕수 씨의 아내. 살풀이춤-승무의 이수자. 김리혜 씨가 본격 춤판을 벌인다. 내달 3~5일 호암아트홀 오후 7시 반.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