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박순철
“그렇다면 성고로 돌아가 항왕과 싸워보잔 말이오?”
장량의 말을 들은 한왕이 왠지 질린 듯한 얼굴로 그렇게 되물었다. 장량이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면서 말을 받았다.
“성고는 몇 달 사이에 세 번이나 주인이 바뀔 만큼 모진 싸움을 치렀습니다. 그 성벽은 헐고 해자는 메워져 지키기에 좋은 곳이 못됩니다. 더구나 대왕께서 그리로 드시면 성난 항왕이 전력을 다해 들이칠 것인데, 그 기세를 어떻게 당해 내시겠습니까?”
그리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머뭇머뭇 말했다.
“차라리 광무산으로 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광무산으로?”
한왕이 얼른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듯 물었다.
“그곳은 형양을 대신해 오창 성고와 연결해 지킬 수 있는 땅입니다. 거기다가 광무산성은 이미 오래전부터 번쾌 장군이 지키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 산성은 번쾌가 이끄는 1만 군사로도 비좁다 들었소. 과인의 5만 대군이 그 작은 산성에 어떻게 든단 말이오? 또 어렵게 성안에 대군을 우겨넣는다 해도 무얼 먹고 싸운단 말이오?”
“그 서쪽 산기슭에는 마른 땅을 파고 지붕을 덮어 만들어 곡식을 갈무리하는 창고(穴倉)들이 줄지어 들어서 있으니, 오창의 곡식은 태반이 거기 있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 곡식을 먹으며 산봉우리 전체를 성채 삼아 험한 동쪽 기슭에 의지해 싸우면 아무리 항왕이라도 쉽게 우리를 어쩌지 못할 것입니다.”
“만일 항왕이 대군을 이끌고 광무산을 돌아 서쪽 기슭으로 밀고 들면 어찌할 것이오?”
아무래도 걱정스럽다는 듯 한왕이 다시 그렇게 물었다. 말을 해 나가는 동안에 더욱 자신이 생겼는지 장량이 한층 차분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광무산 서쪽은 하수(河水)가 흘러 조나라에서 오는 우리 원군에게 열려있는 셈이니, 항왕으로서는 뒤가 불안할 것입니다. 거기다가 그 기슭은 경사가 완만한 대신 정면이 넓게 펼쳐져 있어 병력을 집중하기에 아주 나쁩니다. 또 산기슭의 혈창(穴倉) 앞에는 높고 든든한 누벽(壘壁)이 쳐져 있어 어떤 산성에 못지않습니다. 기세를 높이 치고 신속함과 집중을 귀하게 여기는 항왕의 성품으로 봐서는 결코 그리로 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걱정이 되는지 한왕의 얼굴은 펴질 줄 몰랐다. 하지만 언제 패왕의 대군이 몰려올지 모르는 터에 그곳에서 한없이 머뭇거릴 수는 없었다. 마침내 한왕은 묻기를 그만두고 결단을 내렸다.
“좋소. 광무산으로 갑시다.”
그렇게 말하고는 사람들을 보내 장수들을 불러 모으게 했다. 오래잖아 장수들이 몰려오자 한왕이 말했다.
“광무산에서 항왕과 싸운다. 모두 진채를 뽑아 광무산으로 가자.”
그러면서 말 위에 올라 앞장을 서는 한왕의 얼굴은 언제 두려워하고 걱정했느냐는 듯 태평스럽기 짝이 없었다.
글 이문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