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파 방송사의 가을 개편을 앞두고 새삼 파일럿(pilot) 프로그램이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개편에 앞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갖고 만든 견본 프로그램이 파일럿 프로그램이다.
방송사는 크게 봄 개편(4월)과 가을 개편(10월) 등 1년에 두 번 정기적으로 프로그램을 바꾼다. 방송사의 프로그램 개편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계절이 바뀐다. 가을에는 낮이 짧아지고 옥외 활동이 줄어드는 생활 리듬의 변화에 맞춰 새 프로그램을 선보이고 시간대를 조정한다. 둘째, 시청률이 저조한 프로그램은 편성표에서 사라지게 된다. 방송사가 광고주에게 파는 것은 프로그램의 질이 아니라 시청자의 머릿수이다. 셋째, 광고주는 대체로 6개월 단위로 프로그램을 후원한다. 개편은 신규 광고주를 유치하는 역할을 한다. 넷째, 사람들의 취향 변화에 부응해 새로운 형식의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다섯째, 외부의 요청이나 압력에 따라 신규 프로그램을 내보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전혀 새로운 프로그램의 아이디어는 △상대 방송사 △광고주나 기업 △업계 전문지나 외국 TV △독립 제작사 △방송인 자신에게서 나온다.
개편에 대비해서 ‘참고용’으로 만든 파일럿 프로그램은 아직 창의성, 시의성, 작품의 완성도 등이 검증되지 않은 시제품이다. 파일럿 프로그램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아이디어를 독립 제작사 등에서 공모하고 기획안을 편성에 필요한 편수의 3배수 이상 골라야 한다. 제작비는 방송사가 부담한다.
지상파 TV도 근년에 파일럿 프로그램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10월 말 개편을 앞두고 ‘좋은 사람 소개시켜줘’(KBS), ‘있다 없다’(SBS) 등 파일럿 프로그램을 잇달아 내보냈다. 정기 편성에 앞서서 시청자의 반응을 사전 탐색해 보자는 취지일 것이다.
그러나 최근 방영된 파일럿 프로그램은 아이디어가 좋으니 시청률이 어떻게 나오는지 한번 보자는 안이한 생각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사전 검증 없이 직접 국민을 상대로 실험을 하는 것이다. 외국에선 파일럿 프로그램을 만들어 200∼400명의 평가단에게 미리 선보이고 여기서 합격점을 받으면 정식 프로그램으로 내보낸다. 또 시리즈의 경우엔 미리 단편으로 제작한 뒤 편성한다.
인체 임상시험을 통해서 효능이 입증된 신약만을 시판하듯이 정신의 양식인 TV 프로그램도 효능 입증 이후에 방송해야 한다. 전 국민을 상대로 ‘생체실험’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김우룡 한국외국어대 언론정보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