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라이프치히대에서 문예창작을 강의하는 강유일 씨. 그는 “독일 작가 지망생들에게 소설 쓰기를 가르치기 위해 시신 해부실, 정신병동, 법정을 직접 같이 찾아다니고 있다”면서 “이번 학기 강의 테마는 ‘동서양 문학 속에서의 사랑의 해부’”라고 말했다. 사진 제공 슈테판 피셔 씨
《강유일(52) 씨는 올해로 데뷔 30년째가 된 중진 여성 작가다. 소설 ‘빈자의 나무’ ‘예언자의 새’ 등 약 30권의 책을 펴낸 뒤 1994년 이후 국내에서 활동을 멈췄다. 그의 많은 독자들은 그가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궁금해 하곤 했다. 그가 지금 머물고 있는 곳은 독일 라이프치히대 독일문학연구소다. 그곳에서 그간 독일어로 작가 지망생들에게 문예창작을 가르쳐 왔다. 그러던 그가 오랜 침묵을 깨고 11년 만에 장편소설 ‘피아노 소나타 1987’(민음사)을 펴냈다.》
이 소설은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우선 옛 동독 지역인 라이프치히에서 ‘독일 민주공화국(동독)’의 잔영이 스러져 가는 과정을 10년 이상 지켜본 그가 유토피아 이데올로기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라마틱하게 써냈다는 점이다.
또한 그가 다른 공역자와 더불어 이 소설을 독일어로 옮겨 곧 독일 현지에서 출간할 예정에 있다는 점도 주목된다. 안정효 씨가 ‘하얀 전쟁’의 우리말 판과 영어 판을 직접 써낸 이후 우리 문학이 체험하는 아주 드문 사례다.
‘피아노 소나타 1987’은 한 병기공학 교수에 의해 폭탄 전문가로 길러진 뒤 동독 카를 마르크스대에서 동유럽 전문가로 교육받은 북한 지식인 한세류의 삶을 그린다. 1987년의 대한항공 여객기 폭파 사건이 큰 소재다. 한세류의 다른 편에는 미국과 이탈리아에서 교육받고 세계 최고 수준의 피아니스트로 자란 남한 출신의 여성 안누항이 있다. 안누항이 체코의 프라하에서 라흐마니노프와 파야를 연주해 갈채를 받던 날 객석에선 한세류가 감동한 채 지켜보고 있었다.
소설은 비극적으로 충돌하고 만나는 두 남녀의 삶을 매우 빠른 장면 전환, 강렬하고도 화려한 문체로 따라가고 있다. 뉴욕 베이징 피렌체 모스크바 베를린 등 세계 곳곳을 옮겨 다니며 취재한 현장감이 살아 있는 소설이다.
한세류가 다녔다는 카를 마르크스대는 현재 강유일 씨가 머물고 있는 라이프치히대의 동독 시절 이름이다. 전화와 e메일로 강 씨에게 그간의 일들과 소설에 대해 물어보았다.
―언제 독일로 갔나?
“남편과 사별한 뒤인 1990년 어린 아들마저 뇌출혈을 일으켜 수술과 치료를 위해 독일로 왔다. 2년 후 돌아왔지만 후유증으로 아들의 몸이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독일에서 머물며 치료하기 위해 1994년 다시 건너온 뒤 지금까지 여기서 살고 있다. 아들은 이제 화가가 되었다.”
―중년의 나이에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곳에서 절필하고 산다는 게 힘들지 않았나?
“독일에서의 무명(無名)은 마치 존재의 가사(假死) 상태 같았다. 라이프치히대 독일문학연구소에서 학생으로 독문학과 뉴미디어를 공부하던 시절 나는 유일한 동양인에 최고령자였다.”
―졸업 후 곧장 강사가 됐는데….
“‘실종자’의 작가인 한스울리히 트라이헬 교수와 ‘비엔나 오페라좌 무도회’의 작가 요제프 하스링거 교수가 각별히 내 글에 신뢰를 가지게 됐다. 트라이헬 교수는 한국 방문 때 작가로서의 나에 대해 상세히 전해 듣고 갔다.”
―이번 소설은 어떻게 쓰게 됐나.
“독일에서 학생 시절 대한항공기 폭파 사건에 대해 논문을 쓴 적이 있다. 모순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했다. 과연 내일 억압과 살인이 없는 유토피아를 위해 우리는 오늘 여기서 살인을 해야만 하는가 하는 모순이었다. 사회주의 동독이 몰락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도 많은 생각을 했다. 한국은 아직도 갈라져 있다. 나는 무엇인가 묻고 싶어졌다.”
권기태 기자 kk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