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시를 눈앞에 둔 여고 3학년의 천금같은 수업시간에도 나는 아련한 추억에 젖어 옛 학창 시절을 이야기하곤 한다. 참혹하던 전쟁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아서, 누구나 가난하여 힘들던 부모들의 시대를 이야기하면 아이들의 눈빛이 반짝거린다. 허기진 배를 달래느라 샘물을 마신 이야기며, 비가 오면 우산도 없이 책보자기를 가슴 쪽으로 매고는 시골의 논둑길을 미끄러지며 달리던 이야기에 이르면 아이들은 아주 진지해진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을 맺는다. “너희들이 살아갈 시대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 험난한 시대를 살려면 이제 공부를 해야 한다.”
험난하지 않은 시대가 어디 있으며, 잔혹한 역사의 격랑이 휩쓸지 않은 나라가 어디 있으랴. 탄식과 감탄을 번갈아 하며 단숨에 읽은 장룽(張戎)의 자전소설 ‘대륙의 딸들’은 1900년대 초부터 거의 100년간에 이르는, 험난하고 격동적인 중국의 근현대사를 다룬다. 작가는 이 책에서 한 군벌의 첩이 됐던 외할머니, 공산당원인 부모와 소녀 홍위병이던 작가로 이어지는 한 가족 3대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작가의 뛰어난 직관이 섬세한 문체로 표현된 이 책은 1991년 영국에서 ‘야생 백조(Wild Swans)’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어 논픽션 최고상을 수상하였고 ‘올해의 책’에 선정되었다.
여인들의 ‘전족’ 이야기로 시작되는 책의 전반부는 부패한 청조의 몰락과 군벌의 대두, 일본의 침략, 만주국과 국민당 시대 및 국공분열과 내전을 거쳐 공산 혁명에 이르는 동안의 중국인들의 투쟁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후반부는 중국 공산화 이후의 대숙청과 대약진운동에 이은 문화혁명 기간의 중국인들의 고난과 해방을 다룬다.
1966년, 곳곳에 숨어 있는 적들을 처단하라는 마오쩌둥(毛澤東)의 한마디 말로 시작된 문화혁명은 10여 년에 걸쳐 중국을 혼돈과 광기 속으로 몰아넣는다. 소녀 홍위병이었던 작가는 문화혁명의 비극을 이 책의 핵심으로 묘사하며, 그것을 ‘끊임없이 대립과 갈등을 일으켜 엄청난 고통과 죽음을 가져온 권력투쟁’이라 말한다.
작가는 끝없는 시련을 겪는 자신의 가족과 고통받는 사람들에게는 따뜻한 시선을 보내면서 부패하고 폭압적인 권력을 차갑게 비판한다. 혁명의 대의를 성취한 후 최고 권력자가 권력을 사유화하여 자신을 신격화할 때 그 혁명은 바로 무서운 재앙이다. 그리고 어떤 집단주의적 이상과 체제도 개인의 생존과 행복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
중국 못지않게 갈등과 비극의 역사를 가진 우리 민족을 생각하면서 나는 청소년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여러 가지 미덕을 갖춘, 읽기 쉬운 책이다. 이 책을 읽는 청소년은 인간과 공동체에 대하여 깊고 넓은 식견을 갖추게 될 것이다. 아울러 국가와 민족은 물론 인류세계의 문제를 성찰하면서, 언제 어디서나 용기와 책임감을 갖춘 개척자로 살게 될 것이다.
가족이 ‘야생의 백조들’처럼 강인한 생명력으로 고난을 극복하고, 장룽이 치열한 공부와 독서로 앞날을 열어 가는 장면은 감동적이다. 최후의 순간에도 문화혁명에 반대하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은 아버지 장쇼유도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과 같은 희망을 붙들고 분투했던 작가는 우리 청소년들에게 용기와 투지를 북돋아 주리라 믿는다.
김회관 경남여고 교사 좋은교사운동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