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그룹 퇴직 임원 A 씨는 삶의 대부분을 수출과 산업현장에서 보냈다. 조국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자부심으로 살아 온 A 씨는 반(反)기업 정서로 얼룩진 중고교 경제교과서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D사의 고교 공통 교과서는 “무엇보다 재벌을 개혁하고 중소기업을 살려야 한다”고, B사의 교과서는 “기업은 망해도 기업가는 망하지 않는다”고 기술했다.
A 씨는 “수출과 산업에 인생을 던진 내가 하루아침에 가치 없는 사람으로 전락했다. 나의 삶을 부정당하는 상황을 수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A 씨는 친구들과 만나 기업인의 명예를 회복하고 경제발전에도 기여할 방안을 논의했다. 이들은 기업과 시장경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확산시키는 일이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A 씨는 자유민주와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시민단체의 관계자를 찾아갔다.
“귀 단체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고 계십니까?”
“우리는 자유민주와 시장경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젊은 세대에게 심어주는 데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저런 운영 자금이 많이 필요할 터인데 어떻게 조달하실 생각인지요.”
“뚜렷한 방안은 없습니다. 회원 각자의 쌈짓돈으로 꾸려 가야죠. 뜻있는 분들의 도움이 있다면 고마울 따름입니다.”
A 씨는 친구들과 함께 5000만 원을 모아 이 단체에 기부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체제의 근본인 대한민국에서 근본을 지키자는 시민단체가 곳곳에 나타나고, A 씨와 같은 자발적 후원자가 등장하는 이유는 뭘까.
시장경제는 하나의 사회 규범으로 ‘맑은 공기’나 ‘깨끗한 물’처럼 모두가 가꿔야 하는 공공재다. 공공재도 재화인 만큼 공동체 구성원들이 지속적으로 시간과 돈, 관심, 애정을 쏟아야 유지할 수 있다. 잘사는 나라일수록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가 발달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공동체의 관심과 투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대한민국이 10년째 중진국 함정에 빠져있는 것은 시장경제라는 공공재가 충분히 공급되지 못한 탓이 크다.
공공재의 위기는 그 비용을 스스로 부담하려는 ‘투자와 행동’이 미약한 데서 크게 기인한다. 그저 누군가가 해 주길 바라는 이른바 무임승차(free riding) 때문이다. 위대한 경제학자 폴 새뮤얼슨은 “공공재의 공급이 사적으로 이뤄질 경우 모든 개인은 다른 누군가가 비용을 지불한 공공재의 소비 과정에 편승하게 돼 결국 공공재는 과소(過少) 공급된다”고 강조했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용되는 정부는 시장경제 같은 사회규범을 최우선적으로 공급해야 한다는 얘기다.
형평과 분배를 앞세워 온 현 정부는 자유민주와 시장경제의 육성에 얼마나 노력했는가. 정부가 공공재 공급을 소홀히 하니 민간이 세금 외에 기부금까지 부담해 가며 공공재 부족분을 메우겠다고 나서는 것이다.
박이택 성균관대 연구교수는 ‘조선 후기의 경제체제: 중국·일본과의 비교론적 접근’ 논문에서 시장경제를 이렇게 강조했다.
“숭고한 이념의 정책이 경제의 번영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근세 동아시아 비교경제체제론에서 배울 수 있는 가장 커다란 교훈은 19세기 이전의 경제에서도 시장경제와 광역적(廣域的) 통합, 시장경제 속에서 성장의 전망을 찾는 경제주체들이 경제의 번영을 가져온다는 점이다.”
임규진 논설위원 mhjh22@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