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이나 방송 모두 구 매체로 치부되는 세상이다. 디지털로 옮겨가지 않으면 생존을 장담하기 어렵다. 문제는 디지털 이행의 단초를 어디서 어떻게 마련하는가 하는 점이다. 대개 대중의 미디어 소비 행태의 변화에서 답을 찾으려고 하지만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 고민이다.
첫째 사례. 미국의 공화, 민주 양당은 최근 2009년까지 방송을 완전히 디지털화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발의의 배경이 중요하다. 모든 아날로그 주파수를 재난 관련 긴급대처기관에 넘겨주기 위해 방송의 디지털화가 필요하다는 논리다. 9·11테러 당시 뉴욕 세계무역센터의 피해가 컸던 것은 긴급대처기관이 이용할 수 있는 아날로그 주파수의 부족 때문이었다는 분석이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여론조사 업체인 포인츠노스 그룹은 이런 갑작스러운 이행이 일반 시청자의 반발을 불러올 것이라는 조사결과를 내놓았다. 조사에 의하면 55%의 가구는 케이블TV에 가입해 아날로그 셋톱박스를 갖고 있는데 추가로 디지털 수신기기를 구입할 의사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가 디지털화를 강제할 경우 케이블 방송사가 시청자에게 디지털 셋톱박스를 구입해 주면서 비용을 시청자들에게 전가하게 되고 결국 대다수 시청자들의 반발을 불러올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무리한 일을 국가가 밀어붙이려 하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 이행은 미디어 소비행태와 관계없이 국가권력의 의도에서 비롯될 수 있다.
둘째 사례. 최근 유럽판을 타블로이드 사이즈로 줄인 월스트리트저널은 미국판도 2007년까지 현재의 15인치 판형에서 12인치 판형으로 축소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지난 3년 동안 40%나 치솟은 신문용지 값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이 직접적인 이유다. 그러나 근본적인 이유는 종이 신문을 포기하고 전자종이로 가기 위한 준비로 판형 축소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컴퓨터 화면을 통한 뉴스 보기에 익숙해진 수용자들의 읽기 습관에 맞추기 위해서도 판형 축소는 불가피하다.
판형을 줄일 경우 기사 길이가 짧아지는 등 정보량이 감소한다. 월스트리트저널은 감소된 정보를 인터넷에는 긴 기사로 다시 살려 올리겠다고 밝혔다. 신문에는 독점 기사나 분석 기사의 하이라이트만 게재하고 관련 심층 기사의 인터넷 주소를 게시한다. 인쇄는 신문사가 아니라 기사가 필요한 독자가 인터넷을 통해 하라는 것이다. 과연 이런 번거로운 뉴스 읽기를 할 사람은 누구일까. 월스트리트저널이 말하듯이 기업의 간부급들은 이런 변화를 원하지만 일반 대중은 아니다.
디지털 이행은 이렇게 엉뚱한 이유로 갑자기 들이닥칠 수 있다.
김사승 숭실대 언론홍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