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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선우석호]‘市場의 힘’ 가르쳐준 그린스펀

입력 | 2005-10-27 03:01:00


1990년대 말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발(發) 금융위기가 확산되고 있을 때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앨런 그린스펀 의장은 내부 반대에도 불구하고 금리 인하를 단행했다. 당시 미국은 경기과열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과열을 부추기기 쉬운 이 결정은 매우 의외였다.

그린스펀 의장이 미국 경기를 더 활성화시킨 이유는 금융위기를 겪고 있는 국가가 미국에 수출할 수 있는 기회를 확대해 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미국이 아시아 외환위기의 부메랑 효과를 피할 수 있을 것이라 본 것이다. 예상은 적중했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은 대미 수출 증가로 큰 폭의 무역흑자를 실현할 수 있었고 외환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글로벌 경제 차원에서 단행한 그린스펀 의장의 선제적 금리 인하가 세계경제를 구한 셈이었다. 이후 그린스펀 의장은 ‘세계 경제대통령’이란 별명을 얻게 됐다.

하지만 그가 모든 경우에 선제조치를 취했던 것은 아니다. 그린스펀 의장은 “가격 거품 현상에 대해서는 FRB가 선제조치를 취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주식이든 부동산이든 거품이 내재된 가격이더라도 ‘시장가격’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거품 자체를 제거하기보다는 거품에 따른 문제를 치유하고자 했다. 1998년 증시 거품이 심각한 상황에서 FRB 내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거품을 인위적으로 제거하는 데 반대한 것도 같은 배경이다. 대신 거품이 자체적으로 꺼지기 시작하자 신속하게 금리를 내려 후유증을 완화했다. 그의 경제철학의 핵심은 시장을 공격해서 거품을 근원적으로 없앨 수도 없으려니와,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할 경우 경제를 혼란에 빠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단지 시장참여자들에게 경기 과신에 근거한 자산가격 상승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그린스펀 의장의 독특한 경제철학은 시장주의에 대한 뚜렷한 신념에서 출발한다. 정부의 간섭에 대해선 대단히 비판적이다. 한 예로 1929년 미국이 대공황에 빠지자 그 해법으로 등장한 ‘뉴딜 정책’이 잘못이라고 본다. 1932년까지의 경제 파국은 1929년 주식 폭락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1930∼31년의 긴축재정이 잘못됐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또 그린스펀 의장은 물가 안정을 위해서는 중앙은행이 강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통화정책을 통해 경기를 인위적으로 부양하지는 않지만 경기가 위축될 때는 신속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가 안정과 함께 경기 침체를 막아 내려는 ‘실용주의 노선’을 중시하는 것이다. 그린스펀 의장이 물가 안정 등 미국 경제에서 빛나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보다 그에 대한 시장의 신뢰가 강했기 때문이다. 강력한 물가 안정 기조를 통해 인플레이션 심리가 안정되고 나면 적극적인 경기 진작 정책을 펼 수 있다는 ‘이상론’을 실현시킨 것이다. 현실 경제에서 ‘최적의 가능성’을 만들어 낸 것이다.

13%에 이르는 살인적인 물가를 잠재워 경제영웅이 된 폴 볼커 의장의 후임으로 1987년부터 FRB를 맡은 그린스펀 의장은 18년간 물가 안정에 성공했다. 이를 바탕으로 미국 경제는 3%대의 장기 호황을 구가했고 주가는 3배 상승했다. 현장을 매일 챙기는 부지런함과 시장주의적 사고, 실용적 판단, 이에 대한 시장의 전폭적인 신뢰가 성과의 밑거름이었다.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24일 그린스펀 의장의 후임으로 벤 버냉키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의장을 지명했다. 월스트리트에서 잔뼈가 굵은 79세의 그린스펀 의장과는 달리 학계에서 성장한 51세의 차기 의장이 자산가격 폭락과 쌍둥이 적자라는 난제를 어떻게 헤쳐 나갈지 세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선우석호 홍익대 교수·경영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