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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박수길]대한민국 정통성과 유엔의 역할

입력 | 2005-10-27 03:01:00


1950년 6월 24일(현지 시간) 트뤼그베 할브단 리 유엔 사무총장은 한밤중에 울리는 전화를 받았다. 존 히커슨 미국 국무부 유엔담당 차관보였다.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북한의 남침을 알리고 긴급 안전보장이사회 소집을 요청했다. 리 총장은 소집된 안보리 회의에서 “북한의 남침 행위는 유엔헌장 및 총회의 결의를 유린했다”고 보고했다. 이 보고 때문에 그는 소련의 미움을 사 결국 총장 2기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사임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한국전쟁은 유엔이 직면했던 첫 시련으로 안보리가 단호하게 대처한 것은 정당했으며 나의 당시 처신은 7년 재직 기간 중 가장 올바른 행동이었다”고 회고했다.

한국 국민이 유엔을 친근하게 생각하고 지지하는 또 다른 이유는 1948년 한국을 독립국가로 세우는 데 유엔이 산파 역을 했고 그 후 한국 경제의 복구와 발전에도 큰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유엔은 한국 국민에게 추상적 의미를 넘어 국가적 정통성과 정체성, 생존과 번영 등에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하겠다.

24일은 유엔 창설 60주년 기념일이다. 유엔은 동서냉전에도 불구하고 국제연맹보다 두 배 이상의 긴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유엔이 성패의 기로에 서 있다”는 경고와 함께 ‘유엔 개혁’의 목소리를 자주 듣는다. 사실 유엔에 대한 회의적인 견해가 제기된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다. 인류가 직면한 새로운 위협, 즉 핵확산, 환경훼손, 테러리즘, 인권유린, 빈곤,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에이즈) 등에 대처하기 위해서 국가 간 협력이 더욱 긴요함에도 불구하고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견해차 등은 유엔의 역할을 크게 제약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와 관련해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올해 3월 유엔을 21세기의 다양한 도전에 더욱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국제기구로 만들기 위한 일련의 개혁안을 총회에 제출했다. 금년 9월 개최된 유엔 정상회의는 빈곤문제 해결을 위해 선진국의 더 많은 정부개발원조(ODA) 제공 등에 합의하고 인권이사회 신설과 안보리 개편을 위한 협상을 종용한 바 있다. 이들은 하나같이 우리 국익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사안으로 대(對)유엔 외교의 중요성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한국은 1948년 정부 수립 이래 유엔과 매우 밀접한 역사적 관계를 맺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옛 소련의 붕괴로 냉전이 종식된 후인 1991년에야 유엔에 가입했다. 이후 유엔에서의 활동은 괄목할 만하다. 안보리 이사국을 지냈고 총회 의장을 배출했으며 내년에는 비상임이사국 진출과 유엔 사무총장직에 도전할 의욕과 능력을 보이고 있다. 앙골라, 동티모르, 이라크 등의 분쟁지역에 유엔평화유지군 또는 다국적군을 파견하고 있으며 또한 유엔 재정 기여도도 세계 11위에 이르고 있다.

세계 12위권의 경제대국이자 모범적 민주주의 국가로 평가받는 한국은 앞으로도 개혁을 통한 유엔의 역할 강화와 유엔을 통한 세계 평화 증진 등의 목표를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할 것이다. 유엔은 금세기에 들어와서 지난 세기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의 복잡한 안보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유엔이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실패할 경우 유엔에 대한 국제사회의 기대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

1950년 유엔 관계자로서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받은 랠프 번치(전 유엔 사무차장)의 말을 우리는 잊을 수 없다. “유엔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존재할 뿐만 아니라 변화를 (급진적인 변화까지도) 폭력 없이 이룩하기 위하여 존재한다.” 우리가 현재 직면한 도전은 유엔이 세계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지도적 역할을 하게 하는 일이다.

박수길 유엔한국협회 회장 고려대 국제대학원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