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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인]쿵짝 쿵짝 쿵짜작∼쿵짝 미국인도 “원더풀”

입력 | 2005-10-28 03:01:00

미국 대학에서 한국의 트로트를 가르치는 손민정 씨. ‘댄싱 온 더 로드’라며 관광버스 춤을 보여 주면 현지 대학생들도 흥겨워한다고 말한다. 변영욱 기자


《올해 3월 미국 일리노이주립대(어배나-섐페인) 음대.

교양 필수과목인 ‘세계음악입문’의 중간고사에 나온 듣기 문제 중 하나.

‘지금 나오는 음악의 장르는?

①엔카 ②트로트 ③컨트리 ④로큰롤’

강의실에는 한국 트로트 가수 나훈아의 ‘모르고’가 나오고 있었다.》

4월 같은 수업 시간. 1학년 백인 여학생 한 명이 수업이 끝나자마자 교수에게 달려온다. “아까 들려 준 남진이란 가수말이에요. 목소리가 어떻게 그렇게 섹시하죠? 음반 구할 수 있을까요?”

한국 음대에서도 다루지 않는 트로트를 미국에서 가르치는 사람이 있다. 주인공은 지난해 텍사스 주립대(오스틴)에서 논문 ‘트로트의 정치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현재 일리노이 주립대에서 객원교수로 강의하고 있는 손민정 씨.

서울대 음대(작곡전공)를 수석 졸업한 뒤 1998년 미국으로 유학간 그는 “미국 학계에서 쏟아지는 대중 음악 관련 논문을 보고 ‘클래식만 음악’이라는 좁은 생각에서 벗어났다”고 말했다.

○미국인도 흥겨워하는 ‘관광버스 춤’

손 씨는 4월 시카고에서 열린 제57회 아시아학회에서 ‘도로 위의 한국의 소리―트로트 메들리’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른바 ‘관광버스 춤’곡으로 사용되는 메들리는 한국의 독특한 음악 양식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트로트 메들리를 모은 ‘고속도로 테이프’는 소리소문없이 수십만 장이 나가기도 한다.

손 씨는 한국의 계모임과 관광버스 문화, 전국의 고속도로망 구축, 경제 성장과 놀이에 대한 욕구 등 여러 요인으로 트로트 메들리의 사회적 가치를 진단했다. 그는 “1980년대 경제 성장으로 서민들이 경제적 시간적 여유를 얻은 데다 계모임을 통해 단체 관광이 활발해진 덕분에 고속도로 버스 안은 교통 수단을 넘어 또 하나의 문화 공간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수업 때 ‘댄싱 온 더 로드(dancing on the road·도로 위의 춤)’라며 트로트 메들리와 관광버스 춤을 강의했고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강의실을 메운 240여명의 학생들은 트로트 메들리에 어깨를 들썩였다.

손 씨는 지난해 9월 일리노이대 인류학과 낸시 에이블먼 교수가 주관한 한국학 워크숍에서 ‘한국의 트로트와 일본의 엔카-가깝지만 먼 관계’라는 주제로 강의하기도 했다. 특히 아시아 음악의 권위자인 스티븐 슬라윅 텍사스 주립대 음대 교수도 손 씨의 박사 논문에 고무돼 수업의 일부에 트로트 강의를 포함하고 있다.


한국의 트로트 가수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남진 나훈아 이미자 송대관 태진아 설운도 현철 주현미.

○“트로트, 컨트리 음악과 비슷해”

트로트는 박수치며 따라 부르기 쉬운 2박자 계열의 리듬과 평탄하지 않고 약간 감질 나게 부르는 창법이 특징. 가사도 ‘어머나 이러지 마세요’(장윤정의 어머나) ‘찢어먹든 볶아먹든 맘대로 해’(LPG의 캉캉) 등 유치할 정도로 쉽게 서민들의 정서를 대변한다.

손 씨는 강의실에서 트로트 가수의 쇼 프로그램을 보여주거나 음악을 들려준다. 이를 들은 미국 학생들이 ‘예전에 들어본 것 같다’는 반응을 보여 비슷한 노래가 있으면 가져오라고 했더니 컨트리 가수의 음반을 가져왔다. 손 씨는 “미국의 컨트리 음악도 강한 2박자에 꺾는 소리를 쓰고 서민의 정서를 대변하는 등 트로트와 느낌이 비슷하다”고 말했다.

그는 “트로트가 1920년대에 일본 엔카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지만 이후 미국 음악 등과 접목되면서 우리만의 스타일로 재창조됐다”며 “어떤 음악도 완전히 순수한 것은 없으며 엔카도 일본 고유의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음대를 나와 트로트를?

국내 음악계는 클래식을 전공한 이가 트로트를 연구한다면 학교에서 자리 잡기 어려울 정도로 배타적이다. 그러나 손 씨는 “트로트가 음악 엘리트들에게 평가절하돼 학문적인 접근이 이뤄지지 않은 데다 트로트에 대해 잘못 알져진 것들이 많아 속상했다”고 연구 취지를 밝혔다.

‘세계 음악 가이드’ 등 음악 관련 유명 서적에는 트로트가 일제 식민지의 잔재이며 한국 대중 음악은 독창성이 없다고 단정짓고 있다는 것이다. 이 대목은 일본인이 썼다.

특히 엔카는 하버드대에서 책이 나올 정도로 활발하게 ‘대접’받는 반면 트로트는 해외는커녕 국내에서도 제대로 연구되지 않는 실정이다.

손 씨는 “트로트가 쉽고 수준이 낮다고 비난하는 이들이 있지만 트로트라는 음악의 특성을 모르는 소리”라며 “쉽다고 해서 수준이 낮은 것은 아닐뿐더러 트로트에는 우리 서민의 오랜 정서가 깃들어 있다”고 말했다.

채지영 기자 yourca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