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저자가 자신의 아들인 ‘벼리’에게 한시를 설명해 주는 형식으로 되어 있지요.
벼리, ‘일이나 글의 뼈대가 되는 줄거리’라고 하는데 뜻과는 멀지만 금빛 벼 이삭이 생각나는 참 어여쁜 이름이지요. 아버지의 책과 함께 벼리의 이름도 널리 알려졌는데 벼리 군은 기분이 어떨까요?
무엇보다도 아들에게 수학이나 영어, 컴퓨터가 아닌 시의 힘에 대해, 우리 마음속에 있는 무늬와 사람 사이의 따뜻한 정에 대해 알려주기 위해 책을 펴낸 아버지의 마음이 먼저 와 닿았답니다. 한시를 전공하는 아버지께서 이렇게 의미 있는 한글 이름을 지어 주신 뜻을 짐작해 볼 수도 있었지요. 이미 이름을 얻을 대로 얻은 책이지만 너무 빛나는 이름에 혹시 그냥 스쳐 지나간 ‘읽새님’들이 있을까 하여 이 책의 향기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한시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은 내가 나 자신의 주인이 되게 만드는 힘’이라는 맺음말처럼, 이 책에서 나누고 싶은 것은 화려한 겉멋보다는 소박하며 진실한 내면의 힘입니다. 그것이 시가 지닌 이상한 힘이기도 하고요. 한시를 이용해 뭔가 아는 체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옛날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 그리고 그 생각이 오늘날까지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셨지요. 언젠가 듣고 좋아서 마음속에 새겨 놓은 말 ‘지금 사람 가벼이 보지 않고 옛 사람도 사랑하네’(‘학산당인보·學山堂印譜’에서)도 이와 통하는 말이 아닐까 해요.
추사 김정희 선생님의 글 ‘작은 창에 햇볕이 가득하여, 나로 하여금 오래 앉아 있게 한다’에 담겨 있는 옛 사람들의 넉넉한 정신과 풍요로움은 오늘날의 그 어떤 물질적 풍요와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이지요.
학교에서 벼리 또래의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어려움에 부닥치는 것 중 하나는 시 공부랍니다. 여러 가지 방법과 쉬운 말로 가르쳐 보지만 시를 어려워하는 친구들이 여전히 많아요. “느껴 보라”는 말을 제일 어렵게 생각하지요. 거기에 대고 한시를 내어 놓으면 아마 고개부터 돌리고 말 걸요. 컴퓨터 게임은 몇 초 만에 화면이 바뀌지만, 시는 오래 바라봐야 하고 오래 생각해야 하는 약된장 같은 것인데, 빨리 정확한 답을 얻으려 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웅변보다 더 힘이 센 침묵, 열 마디보다 더 큰 울림이 있는 한 마디. 그런 힘이 시 속에 있지요.
본문에 있는 한시는 우리말로 풀어 놓았고 원문은 뒤에 실었기 때문에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어 좋습니다. 서서히 다가오는 듯하다가 어느 날 와락 안겨 드는 가을 단풍처럼 한시의 큰 힘에 빠져들 수 있지요. 무엇보다도 시는 읽는 맛인데 나직이 읊조려 읽어 본다면 시의 깊은 맛을 더할 수 있을 겁니다. 시에는 이상한 힘이 있다고 했는데 책 속에 있는 이 문장 ‘꽃을 밟고 돌아가니 말발굽에서 향기가 난다’처럼 꽃에서 묻어나는 향기와 같이, 이 책을 만나고 느끼고 깨달아, 사물을 바라보는 방법과 자기의 생각을 표현하는 방법을 조금씩 배워 나갈 수 있다면 온 삶에 향기가 채워지지 않을까요.
벼리 군도 아버지의 바람처럼 마음과 마음이 오가는 관계의 힘을 소중히 여기는 지혜로운 사람으로 커 나가면 좋겠습니다.
김태희 고양 백마중 국어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