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전시]老? NO!… 원로화가들 잇단 전시회

입력 | 2005-11-01 03:00:00

구사마 야요이 작 ‘호박’ (2005년)


《지난주 85세 피아니스트 윤기선 씨가 제3회 한인하 피아노상 수상자로 선정돼 문화계에 화제가 되었다. 이 상을 제정한 원로 피아니스트 한인하 씨 역시 올해 아흔으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음악계뿐 아니다. 최근 미술계에도 일흔 넘은 국내외 노작가들의 전시가 유난히 많이 마련돼 이채롭다. 젊음 찬양의 시대를 거스르며 시간을 잊고 왕성한 창작열을 불태우고 있는 이들의 작품들에선 에너지와 활력이 넘친다. 전시장을 한바퀴 돌고 나오면 생명력이 젊은이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76세 日구사마 야요이 서울서 대규모 개인전▼

붉은 원색이 강렬한 작품 ‘점’ 시리즈 앞에 서 있는 구사마 야요이 씨. ‘무녀’라는 별명에 걸맞은 강렬한 눈빛에서 20대 젊은이를 능가하는 힘이 느껴진다. 게다가 가발과 짙은 화장 때문인지, 일흔여섯처럼 보이지 않는다. 사진제공진화랑 15일까지 서울 종로구 통의동 진화랑(02-738-7570)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여는 구사마 야요이 씨는 올해 일흔 여섯의 여류작가다. 현재 도쿄에서 작업하고 있는 그는 젊은 시절,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존 케이지 등 당대 전위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독특한 작품세계를 펼쳐 일본이 낳은 세계적 작가 반열에 올랐다. 이번 한국전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물방울’과 ‘점’ 시리즈를 비롯해 ‘호박’을 형상화한 설치물 등 대표작 45점이 망라되는 대규모다.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면 높이 1.5m, 폭 1m의 대형 호박이 관람객을 압도한다. 노란색 바탕에 수많은 검은 점으로 장식된 화려함에 깊은 손맛이 배어 혼을 느끼게 한다. 작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밭에서 나는 호박으로 끼니를 때운 경험을 작품에 응용해 호박을 강인한 생명력의 상징으로 표현하고 있다. 전시장 안에 놓인 화려한 원색의 물방울, 점 시리즈들도 작가의 작품세계의 진면목을 보여주기에 손색이 없는 대표작들. 모두 지난 5년간 제작된 신작들이다. 작가는 눈만 감으면 색과 이미지가 떠오르는 예술 강박과 심한 불면증으로 도쿄의 한 정신병원에 10여 년째 ‘거주하면서’ 낮에 작업실로 출근하는 특이한 일상을 살고 있다.

올해 개관 33주년을 맞은 진화랑의 사장 유진(73·여) 씨 역시 화랑계의 노장. 구사마 씨와 20년째 교류해온 유 씨는 “평생을 작업 하나에만 에너지를 모으고 있는 구사마 선생을 만나러 한 달에 한 번꼴로 도쿄에 가는데 그때마다 영생의 에너지를 받고 오는 느낌”이라고 전했다.

▼77세 김영재씨, 산 오르며 자연의 장엄미 담아▼

자신의 연작인 ‘산’ 앞에 선 김영재 씨. 사진 제공 갤러리 인 서울 종로구 팔판동 갤러리 인(02-732-4677)에서 11일까지 전시회를 여는 김영재 씨 역시 일흔일곱이라는 나이를 잊고 국내외 산을 직접 오르며 이를 작품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노장. 1979년 알프스 정상의 만년설로 뒤덮인 산악의 비경을 접한 후 ‘산’ 그림만 그려온 그는 이미 아프리카 킬리만자로, 남미 안데스, 히말라야와 주변인 네팔의 안나푸르나, 시킴과 부탄의 히말라야, 티베트 고원 등의 산악 절경을 직접 다니며 화폭에 담아 온 등반가이자 화가이다.

청(靑)색이 주조인 그의 산 그림은 단순히 평면적인 모습이 아니라 높은 곳에서 거대한 산세를 내려다보며 전체적인 웅혼함을 담아내는 게 특징. 이를 위해 작가는 등산도 하지만, 때로 경비행기나 헬기를 이용한다. 이번 개인전의 출품작 25점 역시 푸른색을 주조로 한 미묘한 색상의 변화와 간결한 구도로 자연의 장엄미를 표현하고 있다.

▼90세 전혁림 화백 신작전 ‘구십, 아직은 젊다’▼

아흔의 나이를 잊은 채 경남 통영의 작업실에서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전혁림 화백. 사진 제공 이영미술관 12일∼12월 18일 경기 용인시 기흥읍 이영미술관(031-213-8223)에서 열리는 전혁림 화백의 신작전 제목은 아예 ‘구십, 아직은 젊다’이다. 1916년 경남 통영 태생인 작가는 줄곧 고향을 떠나지 않으면서 독특한 색감 구상과 추상을 넘나드는 조형의식으로 ‘한국적 색채화가’라는 독특한 자기세계를 구축해 왔다.

전 화백은 “밤낮없이 심지어 꿈속에서도 그림을 그리고 있다”며 “화업 70년에 이렇게 그림이 잘 되는 적은 일찍이 없었다”고 말했다. 출품작들도 ‘기둥 사이로 보이는 한려수도’ 등 1000호가 넘는 초대형 대작이 3점이나 있어 작가의 왕성한 창작의욕을 느끼게 한다. 320개의 목기 소반에 그린 ‘새 만다라(曼陀羅)’ 시리즈를 비롯한 유화, 수채화 40점 등 400여 점의 전시작들이 모두 올해 들어 그린 신작들이다.

1년 전부터 매주 주말이면 만사를 제쳐놓고 서울에서 420km가 넘는 길을 달려 통영으로 전 화백을 찾아간다는 김이환 관장 역시 올해 일흔한 살이다. 기업체 임원으로 정년퇴임하고 미술관을 경영하고 있는 그는 “젊은이 못지않은 형형한 눈빛의 전 화백을 만나고 오면, 나도 생기가 난다”며 “요즘 주변에는 늙으나 젊으나 하릴없이 노는 사람들 천지인데 예술세계에는 나이도 정년도 없으니 나이를 탓하지 말고 새로운 취미와 관심을 갖는 게 생의 활력을 얻는 데 큰 도움을 준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