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특유의 촌철살인의 위트와 따뜻한 정이 배어 있는 이근삼 씨의 유작 희곡 ‘멧돼지와 꽃사슴’을 무대에 올리는 이유정, 김종석 씨(왼쪽) 부부. 오른쪽 사진은 이 연극의 주인공을 맡은 원로 여배우 백성희 씨(오른쪽)와 윤주상 씨. 이훈구 기자
○ 13년 전의 바람… 딸과 제자, 부부가 돼 연극 만들다
“니네 둘이 함께 연극 한번 해보라우.”
1992년 어느 날, 국내의 대표적인 희극 작가 이근삼 씨가 술에 취해 불쑥 이런 말을 던졌다. ‘니네 둘’이란 무대미술을 공부하던 막내딸 유정(38) 씨와 이 씨가 아끼던 서강대 연극반 제자이자 당시 자신의 조교(신문방송학과)였던 김종석(39) 씨다.
무대미술가가 된 딸과 연극 연출가가 된 제자는 그 후 부부가 됐지만, 두 사람이 함께 연극하는 것을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아버지의 바람은 13년 후에야 이루어지게 됐다.
고인이 된 이 씨의 2주기(28일)를 맞아 마침내 두 사람은 고인의 작품 중 유일하게 연극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던 유작 희곡 ‘멧돼지와 꽃사슴’을 함께 무대에 올린다. ‘제1회 명작 코미디 페스티벌’ 참가작의 하나로 30일 추모 공연으로 시작해 다음 달 11일까지 문예진흥위원회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공연된다. 02-923-2131
○ ‘꽃사슴’ 백성희와 ‘멧돼지’ 윤주상을 위해….
지난달 31일 밤 10시, 서울 강남에 마련된 ‘멧돼지와 꽃사슴’ 연습실. 쌀쌀한 날씨 때문인지 난로를 2개나 피워 놓은 채 한창 연습 중이었다.
꽃사슴처럼 고고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사는 왕년의 여배우 ‘소록 여사’ 역은 원로 배우 백성희(81) 씨가, 앞뒤 가리지 않고 멧돼지처럼 저돌적인 성격의 체육 교사는 중견 배우 윤주상(56) 씨가 맡았다. 이 희곡은 처음부터 이 씨가 두 사람을 위해 쓴 작품.
“2000년 봄에 우연히 백성희 선생님과 함께 이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백 선생님과 제가 작품을 한번도 같이한 적이 없다는 말에 놀라시면서 ‘내가 (두 사람을 위해) 쓸게’ 하시더군요. 3개월도 안 돼서 이 작품을 들고 오셨어요.”(윤주상)
“대본 곳곳에 제 흔적이 보여 혼자서 웃기도 했어요. 언젠가 이 선생이 저를 두고 ‘(여러 소리를 내는) 오케스트라 같다’고 했는데 그 말도 그대로 대사에 넣었더군요. 내가 이 선생 작품을 많이 했지만, 이 선생이 나를 위해 희곡을 쓴 것은 이 작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에요. 그래서 이 선생이 살아 있을 때 이 작품을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너무 커요.”(백성희)
두 사람을 위해 ‘맞춤’ 생산된 희곡이어서일까? 연습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데도 대사가 두 배우의 입에 착착 감겼다. 두 사람은 입을 모아 “제대로 된 코미디는 인생의 페이소스를 담아낼 수 있어야 하는데 요즘은 잘못된 코미디가 너무 많다”며 “가벼운 웃음들이 판치는 이런 시대일수록 이 선생이 더 그립다”고 말했다.
○ ‘꽃사슴’ 같은 환상 ‘멧돼지’ 같은 현실
‘멧돼지’와 ‘꽃사슴’은 각각 두 주인공의 성격과 함께 현실과 환상(꿈)을 상징한다. 상반된 두 사람을 통해 삶의 실존적 의미를 묻는 작품. 이근삼 특유의 촌철살인의 위트와 함께 인간에 대한 따뜻한 정이 배어 있는 작품이다. 이 희곡에는 지문이 아예 없다. 생전에 이 씨가 지문 없는 이 작품을 주며 “알아서 하라우”라는 말만 남겼기 때문.
연출을 맡은 사위 김 씨는 “멧돼지 같은 사람에게도 꽃사슴 같은 면이 있고, 꽃사슴 같은 사람에게도 멧돼지 같은 면이 있다는 점에서 멧돼지와 꽃사슴은 한 사람의 양면성을 다뤘다고 볼 수 있다”며 “이 작품의 화두이자 현실을 버티게 해주는 힘인 ‘꿈과 환상’은 아버님의 후기 작품에서 보여지는 일관된 주제”라고 설명했다.
딸 유정 씨는 “작품에 아버지가 평소 집에서 하던 일상 대화들이 그대로 녹아 있다”며 “아버지가 이 작품을 보실 수 없는 것은 안타깝지만 작품을 통해 매일 아버지를 다시 만날 수 있어 행복한 작업”이라고 말했다.
강수진 기자 sjk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