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달이에 캐스팅 된 ‘아담사이즈’의 역대 반달이들.
‘키 작은 여배우를 찾습니다.’
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양재동의 한 뮤지컬 연습실에서는 이색 오디션이 열렸다. 30만 명의 관객이 다녀간 흥행 연극 ‘백설공주를 사랑한 난장이’(이하 ‘백사난’) 오디션. 여기서 뽑힌 배우는 주인공인 ‘제4대 반달이’와 ‘난쟁이’ 역으로 내년 무대에 서게 된다.
연출을 맡은 박승걸 씨는 “‘반달이’ 역에는 155cm 안팎의 키에 얼굴이 작고 깜찍한 이미지의 여배우를 찾는다”고 말했다.
‘키가 작을수록 유리한’ 오디션이어서인지 이날 연습실은 ‘아담 사이즈’ 여성들로 붐볐다. 이들은 “오디션에 응모하려 해도 항상 키 때문에 망설여져 포기했었는데 ‘백사난’은 ‘키 몇 cm 이상’이 아니라 ‘몇 cm 이하’라는 조건이라 자신감을 갖고 응시했다”고 입을 모았다.
연극 ‘백설공주를 사랑한 난장이’ 오디션에 참가한 응시생들. 박영대 기자
○ 155cm의 숨은 보석 찾기… 아담 사이즈 그냥 가버리면 안돼요
심사위원들의 첫 질문은 누구에게나 같았다.
“(지원서에 적힌) 이 키가 가감 없는 본인 키 맞나요?”
어떻게든 늘씬하게 보이려는 다른 오디션과 달리 이날 ‘반달이’를 지망한 응시생들은 최대한 작아 보이도록 굽 없는 운동화마저도 벗고 들어왔다.
“157cm 맞아요? 더 커 보이는데.”
“아니에요, 제가 원래 키보다 더 커 보이는 스타일이어서 그래요.”
키를 놓고 한 응시자와 심사위원 간에 가벼운 실랑이가 벌어지자 연출가가 대기하고 있던 여배우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실제 공연에서 ‘난쟁이’ 역을 맡고 있는 여배우 고은경 씨가 옆에 나란히 서서 응시자의 키를 ‘실측’해 보았다.
키 작은 20대 여성이 많이 모였지만, 그래도 ‘155cm 미만’은 드물다보니 조건을 갖춘 지망생은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152cm인 한 응시생이 긴장한 탓에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자 심사위원들은 “쉬었다가 조금 진정되면 다시 기회 줄 테니 해보라”고 배려한 것으로도 모자라 “절대 그냥 가버리면 안돼요”하고 거듭 당부했다.
박 연출가는 “키 155cm 이하의 여배우는 연극판에 거의 남아있지 않다. 대부분 배역을 맡기 힘드니까 버티지 못하고 연극을 그만두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 것 같다”고 말했다.
이날 오디션에 온 153cm의 연극배우 김경미(25) 씨는 “키 때문에 다른 연극에서는 아이 역이나 할머니 역, 아니면 아예 캐릭터가 강한 조연 외에는 거의 맡기 힘들다”고 말했다.
○ 키가 너무 커(?) 탈락… 반달이는 과연 어디에?
오전 10시에 시작된 오디션에 오후 5시를 넘겨도 마땅한 ‘반달이’가 등장하지 않자 심사위원들은 초조해 했다.
마침내 극중 ‘반달이’처럼 모자를 쓰고, 이 연극의 상징인 안개꽃까지 한 아름 안은 후보가 들어오자 심사위원 중 누군가가 “드디어”하고 중얼거렸다. 큰 눈에 작고 예쁘장한 얼굴이 딱 ‘반달이’ 이미지였다.
하지만 반가움은 곧 실망으로 바뀌었다. 지원서에 적힌 키는 159cm.
“여기 적힌 키가 정확한 건가요?”
“…사실은 159.6cm인데요.”
한숨과 함께 심사위원들은 채점표에 적었다. ‘반달이 ×, 다른 난쟁이 가능.’
○ 반달이 캐스팅이 작품 하나 올리는 것보다 힘들어
‘백사난’에는 일곱 명의 난쟁이가 등장한다. 난쟁이는 작게, 공주와 왕자는 정상적인 키로 보여야 하는 데다 첫째 난쟁이부터 막내 난쟁이까지는 차례로 2∼3cm 키 차이가 나야 한다. 막내인 반달이가 155cm 이하여야 하는 이유도 이 때문. 1대 반달이 최인경은 153cm, 2대 권혁미는 155cm, 3대 구윤정이 155cm였다.
다른 배역의 캐스팅도 쉽지는 않다. 반달이보다 조금 커야 하는 여섯째 난쟁이는 155∼160cm, 백설공주와 1인 2역을 해야 하는 다섯째 난쟁이는 160∼163cm가 조건. 넷째 난쟁이는 165cm 미만이되 독창 부분이 있어 노래를 잘해야 한다. 첫째와 둘째는 165cm을 넘어도 된다. 유일한 남자 배우이자 왕자 역은 셋째 난쟁이 역까지 겸해야 하므로 174cm를 넘어서는 안 된다.
박 연출가는 “일반적으로 연극은 뮤지컬과 달리 배우의 외모나 키에 대한 제한이 적은 편이지만 이 작품의 경우 신체 조건이 절대적”이라며 “반달이 찾는 일이 작품 하나 만들어 무대에 올리는 것만큼이나 힘들다”고 말했다.
강수진 기자 sjk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