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 캐리와 케이트 윈즐릿이 주연한 영화 ‘이터널 선샤인’. 사랑과 기억의 얽힌 관계를 풀어낸 색다른 러브스토리다. 사진 제공 도로시
첫눈에 반해 한때는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두 연인이 차츰 삐걱거린다. 남자가 샤워한 뒤 머리카락이 덕지덕지 붙은 채로 남겨둔 비누처럼 사소한 일상도 티격태격 말다툼의 이유가 된다. 둘은 첨단기술의 힘을 빌려 아예 서로의 사랑에 대한 기억을 깡그리 지우기로 한다. 이상한 일이다. 그 상실의 과정에서 둘은 되레 소중한 것을 깨닫는다. 기억은 지워도 사랑은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짐 캐리, 케이트 윈즐릿 주연 ‘이터널 선샤인’(원제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은 사랑과 기억에 관한 독창적이고 매력적인 영화다. 기본적으로는 사랑의 발견과 상실, 재발견을 다룬 러브스토리지만 할리우드의 국화빵 같은 애정영화와는 궤도를 달리한다. ‘아픈 기억만 삭제할 수 있다’는 기발한 발상에 멜로드라마, 로맨틱 코미디, 판타지에 SF까지 뒤섞어 놓은 기이한 전개방식, 인물들의 심리변화를 표현하는 미려한 영상까지 어우러져 작품에서 묘한 아우라가 발산된다. 10일 개봉. 15세 이상.
○ 사랑도 지워질 수 있을까?
평범하고 소심한 남자 조엘(짐 캐리)은 요란한 머리색깔만큼이나 천방지축 기분파인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즐릿)과 사랑에 빠진다. 둘은 정반대의 성격을 가졌지만 무지하게 외로운 영혼들이란 점에선 닮았다. 어느 날 조엘은 클레멘타인이 일하는 책방에 찾아가지만 그녀는 조엘을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 클레멘타인이 기억삭제회사에 찾아가 조엘과의 기억을 모두 지워버렸던 것. 화가 난 조엘도 사랑했던 시간을 머릿속에서 삭제하려 한다. 막상 기억이 사라져 가는 그 지점에서 조엘은 자신이 지우려했던 사랑의 의미를 깨닫는다. 머릿속에서 희미해져 가는 기억을 붙잡기 위해 그는 처절하게 몸부림친다.
올해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은 이 영화는 ‘존말코비치 되기’(1999년)라는 시나리오를 쓴 뒤 천재작가로 찬사를 받은 찰리 카우프만과 국제적인 뮤직비디오 작가로 명성을 날린 프랑스의 미셸 공드리의 합작품. 코믹하면서도 사랑과 삶에 대한 예리한 통찰이 담겨 있다. 공드리 감독은 연출까지 맡아 감각적이고 세련된 영상으로 사랑과 기억의 상관관계를 풀어 나간다.
○ 잊고 싶은 기억, 남기고 싶은 기억
‘망각한 자는 복이 있나니, 자신의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라.’(니체)
한평생 사는 동안 잊고 싶은 기억이야 얼마나 많을까. 누구든 창피하고 부끄러운 실수와 상처들로부터 해방되고 싶다. 이 영화에서 조엘은 ‘고통의 기억을 안겨준 그녀를 지울수록 그녀가 더욱 그립다’는 것을 깨닫는다. 머릿속에선 지워져도 마음속의 기억은 남는다는 의미를 배운다. 기억이 사라지면 나도 사라지는 것이다. 모든 기억은 내 삶의 일부기 때문이다.
영화 초반부, 어디까지가 과거 기억이고 어디부터가 현실인지 모호한 이야기 전개방식은 관객들을 미로에 빠뜨린다. 난해하고 혼란스럽다. 그러나 굳이 하나하나 에피소드를 구별짓지 않아도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영화는 첫 장면과 끝이 하나로 이어지면서 스스로 비밀의 빗장을 풀어 버린다.
잊혀지는 것도, 잊는 것도 두렵다. 사랑했던 기억 때문에 괴로운 적이 있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갈 만한 영화다.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