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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방형남]혈맹카드 vs 민족카드

입력 | 2005-11-10 03:02:00


다음 주로 다가온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의 방한은 ‘역사적 외교 행사’다. 1995년 장쩌민(江澤民)의 방한 이후 무려 10년 만에 중국 국가주석이 오기 때문이다. 중국은 지리적으로는 이웃이지만 우방(友邦)이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나라라는 현실을 절감케 하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모저모 따지다가 국가주석 취임 후 2년 8개월 만에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참석하는 길에 서울에 오는 후 주석에게서 정부는 어떤 성과를 끌어낼 수 있을까. 결과를 기다려야겠지만 국빈 방문에 걸맞은 최고 예우를 갖춰 그를 맞아도 ‘전면적 협력 동반자 관계’라는 양국의 기존 교류 수준을 뛰어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보다는 중국 최고 지도자의 한반도 인식이 초래할 후폭풍이 걱정된다. 예상컨대 한반도의 북쪽과 남쪽 방문에서 후 주석이 거둘 최대 성과는 남한과 북한의 차이에 대한 확신이 될 것이다.

그는 방한 직전 북한을 먼저 방문함으로써 ‘선(先)평양 후(後)서울’ 정책을 행동으로 보여 줬다. 북한은 ‘혈맹 카드’로 맞장구를 쳤다. 60만 명이나 되는 북한 주민들의 열광적인 길거리 환영.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 스스로 두 차례나 공항에 나와 후 주석을 껴안으며 몸으로 혈맹을 약속했다. 14억 인구를 자랑하는 중국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환대였다.

그에 비하면 남한의 후 주석 영접은 얼마나 썰렁할까. 환영 인파가 없는 것은 물론 2003년 7월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했을 때 “마오쩌둥(毛澤東)을 존경한다”고 했던 노무현(盧武鉉) 대통령도 후 주석을 끌어안지는 않을 것이다. 혈맹을 뛰어넘는 관계를 제시할 수도 없다. 후 주석이 “남한과 북한은 다르다”는 결론을 굳히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안타까운 것은 북한의 혈맹 카드가 추파로 보이기 때문이다. 얇은 한복 차림의 북한 여인들이 왜 찬바람에 떨면서 장시간 기다리다 발을 구르며 외국 지도자를 환영해야 하는가. 중국이 지어 준 유리공장으로 후 주석을 안내하는 김 위원장의 발걸음도 초라해 보인다. 그렇게 북한은 중국의 품속으로 점점 파고들고 있다.

혈맹 카드에는 죽느냐 사느냐의 절박함까지 담겨 있다. 상상하기도 두렵지만 북한에 통제하기 어려운 급변(急變)사태가 닥칠 때 김 위원장은 누구에게 매달릴 것인가. 지상 최대의 환영을 하고 혈육처럼 끌어안은 중국을 제쳐 두고 어디에서 보호자를 찾으려 할 것인가.

혈맹 카드 옆에 나란히 세우면 북한이 남한을 향해 흔드는 ‘민족 카드’는 미끼처럼 보인다. 미끼는 물면 좋고 물지 않으면 그만이다. 북한이 최근 전체 주민이 쓰고도 남을 엄청난 분량의 의복 신발 비누 등을 요구해 뉴스가 됐지만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난해 의료장비 지원을 위해 북측 대표단과 만났던 남측 민간 대표단원들은 책상 위에 수북이 쌓인 요구품목 목록을 살펴본 뒤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한다. 동행했던 국내 최상위급 병원장은 “북의 요구대로 시설과 장비를 지원하면 남한의 어느 병원보다 좋은 병원을 세울 수 있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얻어 가면서도 먼저 크게 불러 놓고 선심 쓰듯 에누리해 주는 북한의 전술은 전방위로 적용된다. 민간 접촉에서 정부 차원 대화까지 민족은 북한이 무언가 요구할 때 긴요하게 활용하는 보조품일 뿐이다.

혈맹국의 지도자로 치켜세워진 후 주석이 펼칠 한반도 정책이 점점 더 평양 쪽으로 기울어질 것이라고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구경하듯 지켜보다가는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엉뚱한 사람이 챙기는’ 처지가 될지 모른다. 추파로 변질된 혈맹도, 미끼를 숨긴 민족도 경계해야 할 때가 왔다.

방형남 편집국 부국장 hnb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