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중순 부산에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총회가 열린다. 하지만 여기에서 무엇을 실현하겠다는 것인지,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
APEC는 일본과 호주의 주도 아래 1989년에 생겼다. 1980년대 중후반, 관세 무역 일반협정(GATT)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기 위한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이 한창일 무렵 경제자유화를 추구하는 압력이 거세졌다. 세계 각국은 지역 수준의 자유화를 추진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유럽에서는 유럽연합(EU) 개혁이 진행됐고 남미에서는 남미공동시장(MERCOSUR)이 구상됐다.
미국이 추구하는 구속력이 강한 경제자유화를 실현하면 국내 시장 보호는 불가능해진다. 하지만 경제자유화 없이는 경제성장도 기대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지역 수준의 경제자유화를 실현해 각국의 자발적 협력을 바탕으로 구속력이 약한 경제자유화를 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아시아의 경우는 그리 간단치 않다. 아시아 지역의 결속은 그들이 압도적으로 의존하는 최대 시장, 미국과의 긴장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이 딜레마 속에서 생긴 APEC는 미국도 회원으로 받아들인 지역경제기구란 점에서 독특한 구상이었다. ‘아시아태평양’이란 말에는 아시아만이 아니라 태평양을 포함한다는 뜻, 즉 아시아와 미국 사이에 다리를 놓고자 하는 희망과 고민이 담겨 있다.
그러나 태평양 건너 나라까지 가맹국으로 받아들임으로써 APEC의 역할은 애매해지고 말았다. 국제기구로서는 드물게 중국과 대만이 모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은 APEC의 성과지만 가맹국을 칠레 페루 러시아 등 거대한 지역으로 넓힌 까닭에 마치 ‘미니 유엔’ 같은 규모가 되었다. 구체적인 쟁점에 집중할 수 있는 기구로서의 의미가 엷어진 것이다. 무역과 투자자유화에 관한 구체적 협의는 APEC란 다자간 교섭의 장이 아니라,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비롯한 양국 간 교섭에서 이뤄지게 됐다.
아시아 국가들과 미국이 같은 자리에 앉는다는 것도 무리한 이야기다. 국내 시장을 보호하려는 동남아 국가들과 미국 사이에는 큰 거리가 있다. 말레이시아 등은 당초부터 미국을 포함한 ‘아시아태평양’이 아니라 동북아와 동남아 국가를 주체로 하는 기구로 해야 한다고 비판했었다. 마하티르 모하마드 말레이시아 총리가 주창한 ‘동아시아경제공동체(EAEC)’는 미국의 강한 비판으로 좌절됐지만 1997년 아시아 통화 위기를 거치며 실현된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3(한중일)은 기본적으로 EAEC 구상과 비슷한 대목이 많다.
일본의 최대 무역상대국이 미국에서 중국으로 바뀐 데서 알 수 있듯 중국 시장의 확대에 따라 아시아 경제의 미국 의존도는 대폭 줄었다. 중국은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과거의 일본 호주보다 더 열심히 아시아 국가들과 경제 외교를 진행하고 있다. ‘아시아태평양’이 아니라, 아시아를 주체로 한 질서를 구상하고 있는 것이다.
APEC 총회 다음 달인 12월에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제1회 동아시아 정상회의가 열린다. ASEAN+3을 포함한 모임으로 ‘아시아’의 주장을 앞세우게 될 것이다. 그러나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에 대해 미국이 거듭 우려를 표하고 있는 만큼 미국에 대항하는 지역 블록을 만드는 것은 한국과 일본뿐 아니라 중국에도 경제적 정치적으로 부담이 크다.
‘아시아태평양’의 테두리 안에서 정책을 생각할 것인가. 혹은 ‘아시아’의 질서를 구상할 것인가. 이것이 APEC 총회와 동아시아 정상회의에 부여된 과제다.
후지와라 기이치 도쿄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