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리허설을 하고 있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사이먼 래틀 경과 단원들. 박영대 기자
“저는 세계 최고의 직업을 가진 사람입니다.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베를린 필 단원들의 연주를 들을 수 있으니까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사이먼 래틀 경은 8일 밤 21년 만의 내한공연을 마친 뒤 리셉션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말을 듣고 있는 단원들은 모두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기자도 그가 정녕 부러웠고, 이렇게 자기 팀원들을 인정해 주는 리더를 둔 단원들이 부러워졌다.
베를린 필의 이번 공연은 세계 최고의 스타들로 구성된 솔리스트 단원들의 한음 한음의 연주가 돋보이면서도, 오케스트라 전체가 마치 하나의 악기를 연주하는 듯 섬세하고 정교한 표현을 들려 주었다. 완벽한 합주력 속에서도 개개인이 별처럼 빛나는 이러한 연주는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그 해답은 리허설 장면을 돌이켜 보니 어느 정도 풀렸다. 7일 오전에 열린 베를린 필의 리허설은 참 특이하게도 시끄러웠다. 대부분 오케스트라의 경우 리허설을 할 때 지휘자만 이야기할 뿐 단원들은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베를린 필은 한 소절 연습이 끝나면 지휘자와 단원들이 모두 나서 떠드는 소리로 소란스러웠다. 맨 뒤에 앉아 있던 금관 연주자가 악장에게 다가와 토론하기도 하고, 현악기 파트에서 활 동작을 이렇게 바꿔 보자는 아이디어를 지휘자가 받아들여 즉석에서 수정하기도 했다.
이러한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은 벤첼 푸크스(클라리넷), 에마누엘 파후드(플루트) 등 세계 정상급 수석들이 각 파트를 책임지고 있는 베를린 필 단원들의 높은 자긍심을 보여 주는 장면이었다. 또한 래틀 경의 민주적 카리스마를 보여 주기도 했다. 베를린 필은 초대 지휘자인 한스 폰 뷜로를 비롯해 아르투르 니키슈,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에 이르기까지 수장의 독재와 카리스마 속에 통제돼 왔다.
그렇다고 래틀 경이 단원들의 힘에 파묻혀 버리는 물러터진 지도자는 아니었다. 오보에 수석주자 마이어는 “래틀 경은 자기가 원하는 음악을 연주자와 관객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 굉장히 탁월하다”며 “그는 ‘영리한 정치가(Clever Politician)’”라고 평했다. 래틀 경은 1999년 단원들의 투표에 의해 상임지휘자로 선출된 뒤에도 오케스트라 운영에 시 정부 등 외부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해 “오케스트라를 독립적인 재단법인으로 바꾸지 않으면 취임하지 않겠다”며 2년간 계약서에 사인을 안 하고 버텼다. 그의 정치적 승부수는 적중했다. 영국 출신의 지휘자가 어떻게 불과 몇 년 만에 자존심 높은 베를린 필의 단원들을 휘어잡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감동의 리더십이었다. 단원들은 각자 솔리스트로서 독주회도 많이 하고, 베를린 필 산하의 30여 개의 실내악단에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마이어 씨는 “래틀 경은 단원들의 독주회 때나 실내악 연주 때 늘 객석에 와 앉아 있다”고 말했다. 연주자들은 무엇보다 자신의 독주회에 찾아와 자신의 음악을 감상해 주는 지휘자에게 감명을 받았다.
은발을 파마한 ‘펑키 헤어스타일’의 래틀 경.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단원들의 개성과 조화를 최대한 살려내는 그의 21세기형 리더십이 123년 전통의 베를린 필을 다시 젊어지게 만드는 것 같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